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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어떻게 당선되었나: 87년 항쟁과 중산층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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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역동적이었던 시기를 꼽자면 1987년이 될 것이다. 

1987년은 1월 박종철 열사 사망, 4월 호헌선언, 6월 항쟁, 8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12월 노태우 당선으로 민주주의 혁명의 기-승-전-결이 모두 이루어진 역동의 해였다. 87년 6월 항쟁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꽃이며, 500만의 민중이 함께한 인류사에서도 찾기 힘든 수준의 시민혁명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혁명이 결과적으로 민주정의당 정권의 재창출 – 즉 노태우 당선으로 귀결되었음은 아이러닉한 일이다. 그렇게 힘들게 항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통령이 된 것은 전두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였기 때문에 이를 두고 “양김(삼김)의 분열로 인한 노태우의 어부지리” 등으로 해석하는 의견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게으른 분석이다. 대안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태우의 당선은 사실 87년 항쟁의 결과이자, 필연이었으며, 87년 6월 항쟁의 성격 그 자체를 정의내리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태우의 당선과 뒤이은 삼당합당은 우연이 아니라 철저하게 87년 항쟁의 결과로서 정리되어야한다.

1987년 항쟁의 성격

1987년 항쟁을 단순히 “민주주의 항쟁”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자. 물론 대중적으로 87년 항쟁은 위대한 시민민주 혁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87년 항쟁에 참여한 500만 주체는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민주항쟁으로만 규정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우선 재야세력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김영함, 김수환, 함세웅, 김영남, 문익환과 같은 사람들이 통틀어 재야 야권 인사로 칭해졌다. 이들은 분명하게도 시위 주도 세력이었으며, 목표는 전두환 군부정권을 무너트리고 서구식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대중적으로는 여기까지만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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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당대 대학생들의 목표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정의 수립이었다. 즉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한열과 박종철 역시 공산주의자였다. 극우 세력의 악선전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통해 이한열과 박종철이 투철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음이 드러난다(믿을 수 없다면 민주화 자료 아카이브에 올라와있는 이한열의 공산주의 서적 플로우차트를 보시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던 CDR파는 1987년 정국을 거치며 소멸되고,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한 PD파, 그리고 북한 노동당과의 연방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NL파가 당시 대학생 운동권의 주도 세력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도 있다. 이들의 목표는 민주노조 수립이다. 196-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급속한 경제개발 정책은 750만의 지방민을 서울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노동여건은 참담했고, 유일한 노조였던 한국노총은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1970년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하여 “노조다운 노조”를 만들자는 일념 하에 1977년 노동교실 사수투쟁, 1976~78년 동일방직 노조투쟁, 1979년 YH항쟁과 같은 “민주노조 설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탄압으로 외면상 민주노조 설립 운동이 중단되었으나 실제로는 김문수를 주도로 하여 인천과 성남, 울산 등의 지역에서 수십개의 민주노조가 설립되었다 해체되고를 반복했다.

또 중요한것은 이 당시 상경한 노동자 절대다수가 호남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이들은 김대중을 지지했으며, 5.18 광주 항쟁의 진실에도 민감히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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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도 항쟁에서 중요한 주체였다. 전두환 정권은 88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미관을 이유로 빈민가를 빠르게 철거하고자 했고 이는 철거민들의 극렬한 반발을 샀다. 82년 목동 철거민 투쟁과 86년 상계동 철거민 투쟁이 특히 유명하며, 그중에서 상계동 투쟁은 87년 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상계동 철거민들은 정부의 보상과 대책을 요구하며 명동성당 앞에서 움막을 짓고 농성을 벌였다.

정리하자면 87년 항쟁에 참여한 주요 주체들은 서로 다른 목적과 배경을 갖고 있었다. 정부의 보상과 주거권을 요구한 도시 빈민, 민주노조 설립을 목적으로 한 노동자들, 공산주의 혁명이 목표였던 대학생 운동권 그룹,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지한 재야 세력 등, 당시 민주화 연합에 참여했던 항쟁 주체들은 “동상이몽” 그 자체였다. 그렇게나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전두환 타도” 다섯글자였다.

왜 1987년이었나?

그렇다면, 왜 이런 항쟁 주체들이 하필 1987년 6월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폭발해 혁명을 가능케 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산층이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러 주체를 연결해, 500만이 참여하는 전민적인 항쟁으로 6.10의 성격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영화 <1987>에 보면 항쟁에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등장인물은 김태리가 역을 맡은 연희라는 가공의 캐릭터이다. 연희는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 유일하게 가공인물이며, 동시에 “일반적인 시민”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또 주목할만한 점은 연희가 당대 서울 중산층의 매우 보편적인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 가족을 두고 여유롭지는 않지만 부족한 것이 없는 집안에서 자라서 서울의 대학교에 다니면서, 전두환 정권의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도 큰 관심이 없는 그런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의 인물은 당대 한국에서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5개년 경제계획은 경공업 중심이었던 한국의 경제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탈바꿈했으며, 이는 유의미한 가정경제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시기 때만 하더라도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수입품 억제로 인한 저소비 경향으로 삶의 질은 풍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시기에 접어들며 삼저호황으로 경기 성장이 다시 호전세로 접어들었으며, 수도권의 중산층은 안정적인 경제적 축적과 강남 아파트로 대표되는 안정적 거주로 인하여 도시 중산층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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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때나 그렇다시피 중산층은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급격한 사회 혼란은 원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군부정권보다 더 두려워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보다 내 집에 강도가 들지 않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정권의 “안보/안전 이데올로기”는 초기 중산층에게 폭 넓은 지지를 받았다. 1981년 제11대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은 현재의 서초구, 강남구를 포괄하는 서울시 제11번 선거구에서 35.92%를 득표했는데 이는 서울 14개 선거구 중 4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1986년 건국대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은 중산층들이 가장 민감한 안보 이슈를 건드렸다. 이른바 평화의 댐 사건으로, 북한에서 댐을 지어 서울 시내를 수몰시킨다는 어처구니 없는 촌극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중산층이 건국대 사건보다도 평화의 댐 사건에 더 민감히 반응해 학생운동을 거의 무력화시킬 정도까지 갔다는 점이다.

1985년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대참패를 당해 전두환 정권이 휘청이는 수준까지 갔음에도 정권이 섣불리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 즉 전두환 정권을 그다지 지지하지는 않지만 공산주의와 급진적 변혁에 더 두려움을 갖고 있는 중산층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학생, 노동자, 철거민, 재야 세력 대 전두환-민정당-안기부가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여전히 전두환이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앞서 말했다시피 평화의 댐 사건 등은 중산층이 사회 주류 세력인 민정당 보수세력을 마지못해 지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한열과 박종철의 죽음은 이러한 흐름을 반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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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로 돌아가, 그렇다면 “안락한 삶”에 의존하고 있던 중산층 캐릭터 연희가 항쟁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이한열의 죽음이었다. 실제 1987년 1월 박종철의 충격적인 죽음은 중산층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으며, 1987년 4월의 호헌선언과 1987년 6월 이한열 사망 사건 등은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민주화 연합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무리 대학생들의 급진적인 요구가 못미더울지언정, 그것이 학생을 죽일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는 합리적인 공감대가 당시 전국의 중산층에게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 아들/형/연인일 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 숨졌다는 것“은 중산층이 지지하던 안전, 안심, 안보의 지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무도함이 선을 넘어 일반 가정까지 침입할 수 있음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산층이 항쟁에 참여함으로서 민주화연합 대 독재정권의 균형추는 민주화연합으로 기울었고, 항쟁은 비로서 전민적인 규모로 확대될 수 있었다.

1987년 6월부터 12월까지

이제 12월 대통령 선거로 넘어가자. 1987년 12월 대선에서 중산층은 명확히 노태우와 김영삼의 손을 들어주었다. 중산층 밀집 거주지였던 강남구에서 1위를 한 것은 김영삼으로, 35.3%를 득표했다. 2위는 노태우로 32.4%였다. 김대중은 25.2%로 3위였다. 김대중이 서울 전체에서 1위를 한 것을 감안하면 강남구의 결과는 특이하다. 특히 강남구와 마찬가지로 중산층 밀집지역인 강동구를 제외하면 김대중이 모든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이 특이하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블루칼라 유권자들의 33.7%가 김대중을 지지했지만 화이트칼라에서는 24.4%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화이트칼라는 모든 직업군 중 가장 김대중 지지율이 낮은 군이었다. 생활수준으로 따지면 중상류층에서 김대중은 23.9%를 차지하는데 그쳤고 중산층에서도 27.3%로 평균 이하였다.

당시 한국갤럽의 회장을 지낸 박무익은 이렇게 평가를 내렸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우리 사회에 보수온건세력이 놀라울 정도로 두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65%쯤 될 것인데, 이것은 노태우, 김영삼 후보의 공동표밭이기도 했다. 그 동안 역대 정권이 이룩한 경제성장의 영향을 양김씨는 과소평가한 것 같다. (후략, 1987년 12월 한국갤럽).”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1987년 항쟁의 주체였던 중산층이 노태우와 김영삼을 지지했다는 것, 둘째, 이들 중산층에게 있어 김영삼-노태우의 간극보다 김영삼-김대중의 간극이 더 컸다는것(즉 김대중을 결코 지지할 수 없었다는 것).

6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항쟁의 주체가 노태우를 지지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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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6.29 선언이 있고나서 일주일도 있지 않아 울산에서 터진 사건이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의 울산 노동자들이 옥교동에서 민주노조를 설립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불과 11일만에 민주노조 운동은 현대 계열사 노동자 전원이 참가한 울산 지역의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했다. 8월 11일 시위 도중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가슴에 수류탄을 맞아 사망한 사건으로 인하여 8월 중순에는 부평, 성남, 울산, 창원 등 전국 각지 공단 지역에서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들불번지듯 일어났다. 당시 노동쟁의는 하루 평균 44건에 달했다.

학생운동도 격화되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즉 전대협이 1987년 8월 19일 설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은 고려대학교 학생회장 이인영이었고 부위원장은 연세대학교 학생회장 우상호였다. 당시 이인영과 우상호의 위상은 거의 야당대표 급이었다. 운동권 내 각 정파들의 정치적 운동도 강화되었다. PD파는 부르주아 혁명(6.10)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이 찾아올 것이라며 가열찬 시위를 벌였고, NL파는 전두환 정권 퇴진과 함께 예속적인 식민지 정권을 타도한 후, 주한미군을 즉각 철거하고 조선노동당 정권과 대등한 연방제 통일을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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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리는 6.10에 참여한 중산층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첫째, 중산층은 반공 통치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다. 둘째, 이한열과 박종철이 불쌍해서, 전두환 정권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런데 셋째, 막상 전두환 정권을 무너트리고 보니 길거리에는 학생들이 사회주의 대혁명을 외치며 뛰어다니고 있고, 주체사상 서적이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고, 노동자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이병철, 정주영을 땅에 묻어버리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6월 항쟁에 참여했으며, 또 항쟁을 성공으로 이끈 결정적인 주체였던 중산층은 전두환 퇴진에는 동의했을 지언정 민주노조 설립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이라는 의제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중산층의 주된 관심사는 경제적 안정과 군사적 안보이다. 전두환 정권이 일반 민중의 삶을 위협할정도로(이한열, 박종철 사건) 선을 넘었기에 그들은 87년 항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동시에, 6월 29일 이후에 선을 넘은 것은 전두환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였던 노동자와 학생, 철거민이 되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6월 29일을 기점으로 빠르게 혁명 대오에서 이탈하였다. 한마디로 혼란이 아닌 안정을 택한 것이다.

노태우, 안정의 후보

더 재밌는건 노태우를 좋아서 찍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점이다. 콘크리트라고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노태우는 안정의 후보로, 김대중은 혼란의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 중간의 김영삼은 군정종식이라는 슬로건에 치중하며 수권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노태우는 명확하게 군부의 후보였다. 그런데 그 점이 이점이었다. 당시 재야세력은 물론 민주화연합의 모든 주체들이 군부 자체가 아닌 군부의 “경제개발”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과소평가했다.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 뽑는게 맞지만, 그래도 경제는 민주정의당과 군부세력이 하는게 낫다는 서민-중산층 내에서의 여론이 상당히 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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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럽의 조사에서 노태우는  서민성, 국제감각, 결단력, 정직성, 합리성 등등 12개 항목중 국제감각을 제외한 11개 항목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고, 후보 호감도 면에서도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을 압도했다. 호감도가 가장 낮은 후보는 김대중으로 호감도가 27.4%에 그쳤는데, 김대중의 최종 득표율은 27.0%로 거의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선거기간 유세 내내 평화민주당은 노태우를 광주학살의 원흉, 살인마, 12.12 군사반란 주모자 등으로 비판했지만 실제로 노태우에 대한 대중의 선호도는 선거기간 내내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노태우 지지자들은 갤럽의 조사에서 새 대통령이 해야할 과제로 가장 우선 경제문제 해결(42.7%)을 꼽았다. 국민 기본권 신장은 24%에 그쳤는데, 이는 36.6%에 달했던 노태우의 지지층이 기본적으로 민주화의 의제 이후의 문제였던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한 중산층~서민층이었고 이에 따라 군부정권이 못미더워도 노태우에 표를 던졌다는 뜻이 된다. 특히, 선거 막판에 25%에 달하는 정치적 무관심자 중 약 70% 가까이가 노태우로 결집했음이 여론조사에서 확인되었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의 슬로건은 크게 두가지였다. “보통사람”과 “이제는 안정입니다”가 그것이다. 대단히 의도된 슬로건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중산층이며, 또 당선되면 이제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가져다줄 “보통 사람들의 후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보통 사람들은 안정을 원했으므로…

김대중에 대한 거부

반대로 김대중에 대한 당대 중산층과 주류세력의 거부는 매우 명확했다. 사실, 김대중과 김영삼 지지층의 간극은 김영삼 지지층과 노태우 지지층의 간극보다 더욱 컸다. 한국갤럽에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사퇴할 경우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이냐고 물었다. 김대중이 사퇴할 경우, 김대중 지지층의 반수(49.4%) 가까이가 김영삼을 지지하겠다고 응답했고, 노태우 지지 응답은 17.2%에 불과했다. 반면 김영삼이 사퇴한다면 누구를 지지하겠냐는 질문에서 김영삼 지지층은 겨우 26.1%만이 김대중을 고른 반면, 노태우는 32.5%, 김종필은 10.9%에 달했다.

이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양김 중 한쪽이 사퇴할 경우 김영삼 대 노태우는 김영삼 44.20% 대 노태우 44.09%로 김영삼의 간발의 승리지만 김대중 대 노태우는 김대중 42.70% 대 노태우 45.59%로 노태우의 신승이다. (김종필 사퇴 시, 노태우 39.19%, 김대중 33.44%, 김영삼 29.80%로 노태우의 낙승이다) 민주정의당의 내부 조사에서도 김영삼 – 노태우의 양자대결은 노태우의 아슬아슬한 승리지만, 김대중 – 노태우 양자대결은 노태우의 압승이었다. 그만큼 김영삼 지지층 사이에서 김대중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이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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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만한 것은 김영삼의 주 지지층이 도시 중산층이었다는 점이다. 김영삼은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에서 1위를 한 것은 물론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도 대학교 졸업자 이상(47.0%), 화이트칼라(45.4%), 중상류층(38.5%)에서 특히 강세를 보였다. 다른말로 하자면 당시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김대중을 “급진적 변혁의 후보” 혹은 “공산주의자”로 보고 거부하는 여론이 분명히 존재했으며, 이것이 사실상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지지자들은 김대중을 찍을 바에는 차라리 노태우를 지지할 정도로 변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중산층이었다.

물론 김대중 본인은 사회주의자가 전혀 아니었고, 도리어 보수적 자유주의자였지만, 당대 사회에 알려진 김대중의 이미지는 급진적 투사 혹은 공산주의자였다. 반면 김영삼은 두차례 가택연금을 당했을 지언정 투사의 이미지는 아니었고, 보다 온건한 보수파의 이미지에 가까웠다(실제로도 김대중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의 후계자이고, 김영삼은 구파인 조병옥의 후계자이므로 얼추 맞는 감은 있다). 항쟁에 완전히 반대하는 시민들은 노태우를, 항쟁에 참여했지만 급진적인 노동쟁의나 학생운동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김영삼을, 그리고 항쟁과 급진적 변혁에 모두 동의하는 시민들은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으로 점차 유권자 그룹이 갈리는 현상이 1987년 연말에 나타났다.

그런데 상술했다시피 1987년 6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와중에, 사회의 관심사는 민주화를 벗어나 혁명 이후의 급진적 변혁이냐 아니냐로 변화하고 있었다. 급진적 변혁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노태우 – 김영삼을 지지했고, 찬성하는 시민들은 김대중을 지지했다. 6월과 12월에는 반년의 시간 격차가 있고 이는 당대 사회의 쟁점을 바꿔놓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만큼 보수파가 노태우와 김영삼으로, 진보파가 김대중으로 갈리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의 유권자 이념 차는 생각보다 컸고, 김영삼과 노태우 사이의 이념 차는 생각보다 작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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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며칠 앞두고 PK 지역을 중심으로 김영삼 지지자들의 큰 이반이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노태우에 표를 몰아주자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측은 내심 부산에서 80%대, 경남에서 60%대의 압승을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부산에서 김영삼 56% 대 노태우 30%, 경남에서 김영삼 52% 대 노태우 41%로 예상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경북 지역에서도 20% 정도는 얻을 것이라는 예상이 무색하게 86%가 노태우를, 9%가 김영삼을 지지했다. 이러한 이반은 김종필 지지자 내부에서도 존재했는데, 김종필은 10월 15%에 달하는 지지를 받았으나 최종 득표율은 8%에 그쳤다.

삼당합당도 이러한 맥락 하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김대중은 차마 찍을 수 없는, 안정을 바라는 온건보수 유권자들이 민주자유당이라는 연합 하에 뭉쳤다는 것이다. 14대 대선 결과를 분석해보면 강남구 전체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27.65%를 득표했다. 반면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표인 74.73%는 1992년 대선에서도 김영삼+정주영+박찬종의 71.24%로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계산을 해보면 대략 3~4% 정도의 유권자만이 삼당합당에 반발해 김대중으로 지지를 옮겼다는 뜻이 되는데, 그만큼이나 삼당합당이 1992년 시점에서는 중산층에게 잘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민심 이반을 겨냥한 민정당의 전략

민정당의 전략은 치밀했다. 중산층이 “경제적 안정”과 “급진적 변혁 반대”를 위해 노태우로 결집하는 것을 주목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을 갈라치기하는 한편 김대중을 급진적 변혁의 후보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악선전을 한 것이다. 당시 MBC의 공정방송위원회가 제시한 증거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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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뉴스데스크가 노태우 서울집회, 김영삼 부산집회, 김대중 김천집회를 보도하며 노태우 4분 20초, 김영삼 2분 25초, 김대중 2분 28초로 확연히 노태우를 더 스크린에 많이 비추어 노태우를 “대세 후보”인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 또한 통상 MBC는 유세장 인파 수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는데 12일 민정당 유세는 200만이 운집했다고 과장되게 명시했다.

12월 5일 민주정의당 부산유세에서 관중동원과정의 자금살포 현장을 부산 MBC가 촬영해 전송했음에도 보도되지 않았다(게이트 키핑).

12월 7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선거유세 이래도 좋은가]는 김대중-김영삼의 상호 비방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김영삼 측이 노태우를 비방하는 것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으며, 김영삼이 김대중을 급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주로 보도해, 사실상 김영삼의 주 지지층이었던 중산층을 자극하는 의도가 있었다.

12월 13일 아침에 방영된 [민중민주주의를 분석한다]는 김대중과 당대 사회주의 운동권 경향이었던 민중민주주의[PD]를 연관지어 사실상 김대중을 급진 마르크스주의 후보로 보이도록 유도하였다. 선거 직전 민중민주파의 지지를 받은 백기완 후보가 급작스레 사퇴한 것은 마치 민중민주파가 김대중을 지지하기 위해 사퇴한것처럼 비추어지며 오히려 김대중의 지지도를 낮추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되었다.

결정적으로 11월 29일 KAL기 실종 사건은 중산층의 주요 관심 사안이었던 안보 이슈를 자극했으며, “안정희구” 세력이 많은 중산층-중상류층 부동표를 여권으로 유도시키는 의도가 있었다.

결론

이 글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987년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목표와 배경을 가진 변혁의 주체들이 중산층이라는 지원군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산층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의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었고, 그들이 항쟁에 참여한 것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사망으로 전두환 정권이 더이상 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세력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6월 29일 이후, 급진적 변혁을 주장하는 노동자 학생 세력과 결별해 오히려 구 체제를 옹호하였는데 이 역시 안정과 번영을 지지하는 중산층의 보편적 성격에 의함이다. 이들은 주로 김영삼과 노태우를 지지했고 따라서 김영삼은 근본적으로 김대중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고, 단일화가 불가능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다. 결국 노동자, 빈민, 재야의 후보를 자처한 김대중이 참패하고, 김영삼이 노태우와 연합하면서 삼당합당을 통해 “주류 중산층 온건보수 세력” 대 “비주류 야당 세력”의 구도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1987년 대선과 1990년 삼당합당은 1987년 항쟁 이후의 급진적 변혁을 저지하기 위한 중산층 온건보수 세력의 철저한 노력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초점이 군부 타도에서 변혁 저지로 옮겨온 시점에서 김영삼-김대중 단일화는 불가했고, 오히려 김영삼은 노태우와 성격이 비슷한 면까지도 있었다.

때문에 김대중은 1991년 지방선거, 1992년 총선, 1992년 대선에서 연이어 실패를 맛봤고, 당시 한국 야권과 변혁 세력은 고립되어 각개격파될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다행인 것은 김대중이 평범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영국 유학과 아태재단 설립, 보수 성향 인물 영입 등 부단히 중도화에 노력해 투쟁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빼고, 정책 제시자이자 노련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1997년 대선 때는 IMF 사태를 노리고 아예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1987년 대선 패배가 중산층의 노태우 지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김대중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중산층을 민주당 지지자로 돌려놓기 위한 김대중의 노력은 가히 존경스러운 수준이다. 그런 모든 노력에도 김대중은 겨우 1.3%p 차이로 199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다른 한편으로, 87년 항쟁에서 “주류 중산층 보수파”의 승리로 인하여, 진정한 혁명의 주체였던 노동자, 빈민, 학생운동 세력은 대부분 고립되어 현재는 아무도 기억을 하지 않는 자들이 되었다. 사실 87년 항쟁의 공은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변혁적 대학생과 민주노조 설립운동가들 그리고 도시 철거민들에게 돌아가야함에도 말이다.

출처: 더불어민주당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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