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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 기념 아이티 독립 이야기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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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기원 1492년,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지원 하에 레츠고 인도탐방기를 찍게된다.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을 돌아 동쪽으로 향해해, 실제로 인도의 고아 지역에 도착한 바스쿠 다 가마와는 달리,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인도 도착하다니까요? 라고 박박 우기던 콜럼버스는 인도 대신, 브랜 뉴 미개척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신대륙, 아메리카다. 대서양을 항해하던 콜럼버스는 저 멀리서 대륙이 있음을 육안으로 확인했고, 근처 섬들에 내려 탐험을 시작했노라.

1492년 12월 5일, 안틸러스 제도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섬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그 섬에 “히스파니올라” 라고 이름을 붙였고, 20일후, 12월 25일, 에스파냐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하나 좌초 시켜 버리고만다 병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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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포르투갈 식민제국은, 적도기니나 상투메 프린시페를 비롯한 서아프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자원과 노동력을 쪽쪽빨아먹고 있었다.

이에 꼴받은 이사벨 여왕은 본국으로 리턴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식민지를 세우기 위한 대규모 지원을 하게 되고, 총원 1500명에 달하는 거대 식민선단이 레츠고 인도 식민화 (인도 아님) 를 찍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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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히스파니올라 식민지는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된다. 콜롬버스 삼형제의 원주민 대학살 대작전과 역병 때문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게되었고, 이에 포르투갈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흑인 노예들을 수입하면서 노동력 부족을 매꾸었다. 여담으로, 1500년에 새로 히스파니올라에 부임한 신임 총독은 크리스토퍼-바르톨로메오-쟈코모 삼형제가 식민지 관리를 개판으로 했다며 감옥에 처박아뒀고, 이 사건으로 콜롬버스 브라더스는 몰락한다. 콜롬버스의 아들내미가 1508년에 총독으로 부임하기는 하지만.

초창기 히스파니올라의 주요 수입원은 금광이였지만, 금광이 고갈되고, 또 사탕수수가 카나리아 제도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에 히스파니올라는 플랜테이션 농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런 산업에 종사하던 흑인 노예들은 콜롬버스의 아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탈주 닌자가 되어 깊은 산속으로 숨었는데, 이들과 산속 원주민들 사이에서 잠보라고 불리는 원주민-흑인 혼혈 자손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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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많은 땅” 이라는 아이티의 산악지대. 수많은 탈주 흑인 노예들이 이곳에 숨어들었다. 자신들이 가진 부두신앙과 함께.

사탕수수의 인기가 떨어지자, 많은 식민지인들은 페루, 멕시코, 쿠바같은 더 나은 식민지로 떠나기로 결심햇다. 가축들은 야생화되어 마구 번식했고 섬의 식생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 당시의 히스파니올라는 토르투가 섬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사략 해적들에게 있어 개꿀약탈지였기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은 약탈을 막고자 개발이 덜 된 서부에 살던 시민들을 비교적 부유한 동부로 옮기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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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북부의 조그마한 섬, 토르투가 (거북이 섬). 캐리비안의 해적에서도 몇번 나왔던걸로 기억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곳임.

약탈을 막을려고 저지랄을 했는데, 무인지대가 된 섬 서쪽에, 토르투가를 근거지로, 에스파냐의 보물선단을 털어먹던 합법 해적들인 프랑스-영국-네덜란드의 사략꾼들 (Flibustier)이 그대로 눌러살기 시작하고, 이들에게 육류를 공급해주던 사냥꾼들 (Boucanier) 과 이 사략선단이 연합하면서 레츠고 대해적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히스파니올라에 프랑스인들이 본격적으로 식민야욕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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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버케니어 – 사략꾼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당연 

토르투가에서 활약하던 “에스파냐의 재앙”. 프랑수와 롤로네, 또는 프랑수와 롤로노아이다.

당연히 롤로노아 조로가 이 사람 이름보고 따왔다.

1665년에 태양왕, 루이 14세가 공식적으로 토르투가와 히스파니올라 서부는 프랑스 영토라는 식민지 선언을 하고,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또는 9년전쟁 / 팔츠 계승전쟁) 의 종전조약인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합법적으로 히스파니올라의 서부인 쌩 도멍그, 현재의 아이티를 집어삼킨다. 이곳에서 프랑스인들은 담배와 가죽을 생산했는데, 훗날 이곳에 프랑스 세네갈 식민회사, 그리고 프랑스 기니 식민회사를 통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입하면서, 다시 설탕산업을 부흥시킨다. 1789년 당시, 이곳은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로, 그리고 세계 커피 수요의 50%를 공급하는 최대의 커피 생산지로 프랑스에 큰 부를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 전체 인구 8분의 1 이 식민지에서 나온 부로 먹고살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시간대를 보면 알 수 있듯, 머지않아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아메리카 13개주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영국 물먹이기 대작전을 펼치다가 자신의 모가지가 날라가는 대참사를 겪게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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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와 15세 때 누적되어왔던 재정 적자에 더해,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경제가 완전히 파탄나자, 시민들이 못살겠다고 대혁명을 터뜨린다. 프랑스 본국이 완전히 흔들리고, 본국의 인권사상이 바다를 건너 전파되자, 인종차별 사회였던 쌩-도멍그 식민지에도 여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시 쌩 도멍그 식민지는 귀족출신의 대농장주과 부르주아지 출신의 대상인들인 Grand blanc 그헝블렁, 큰 백인들과 공무원 노동자들인 Petit blanc 쁘띠 블렁, 작은 백인들이 노예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던 사회였다. 실제로 흑인에게만 적용되는 법 규정인, Code noir 꼬드 누와흐라는 것도 존재했으니.

쌩-도멍그가 속한 프랑스령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는, 1788년에 60만명의 노예들, 3만명의 자유흑인, 그리고 5만 5천명의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 식민지 주민들은 프랑스의 재정문제를 비롯한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삼부회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참가하지 못했는데, 이에 실망한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인들은 이에, 프랑스 정부에 더 큰 자치권을, 특히 생산품들을 본토에서만 수입하고, 본토에게로만 수출하는 식민지 무역독점법 철폐를 요구하게 된다.

반면, 흑인 노예들은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프랑스 본국에서 수입받으면서, 자유의 희망을 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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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부유층들이 모여서 회의를했던 공간인, 파리의 마씨악 호텔.

마씨악 호텔 클럽은 흑인들의 친구 협회와 대적하는 포지션의 프랑스 정치 이익집단이였음.

프랑스 본토의 혁명으로 인한 대혼란을 틈타, 식민지의 대지주들은, 식민지는 혁명 이전의 법의 적용을 받고, 자신들만의 의회를 갖을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킨다. 쌩-도멍그 식민지에서는 한발 더 나가, 무역의 자유와, 자유 흑인을 배제한 의회 설립등을 추진했다. 당연히 프랑스 본국에서는 식민지의 이런 모습이 굉장히 고까웠고, 백인 지도층의 난리부르스를 막기 위해, 흑인들과 손을 잡고 백인들을 억압한다.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인 흑인들에게 진압당한 백인들은 분노를 불태웠고, 흑인 자유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자유흑인들은 프랑스 본토에서 쟈코뱅이나 흑인의 친구 협회같은 정치 집단과 접촉해 노예제 철폐를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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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던 와중, 서력기원 1791년, 8월 14일 Dutty Boukman 이라는 한 흑인 노예를 중심으로,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난다. 이들은 서아프리카 출신으로, 부두술을 믿던 사람들이였는데, 반란 전에 부두교 집회를 열어, 그곳에서 검은 돼지를 죽이고 그 피를 마심으로써 무적이 되는 의식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북부에서 시작된 노예반란은 수천의 백인들을 학살했고, 사탕수수와 커피 농장은 불에 타, 초토화 되었다. 부크만은 반란 도중에 목숨을 잃지만, “왕당파 흑인” 들이 카톨릭과 왕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소란이 계속 이어졌다. 반란군들은 점령지를 늘려나갔지만,

반란군의 통치-권력행사 능력 부재로 인해, 반란 역시 늘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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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이 대폭동 대작전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10월이 다 되서야 프랑스 본토에 전해지게 된다. 프랑스의 혁명 온건파들인 지롱드 파 소속 정치인들은 흑인 인권과 자유를 강력하게 지지했지만, 노예제 철폐라는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고, 흑인 자유민들에게 ‘만’ 완전한 시민권을 부과하는 것으로 프랑스 내부에서의 논쟁은 일단락 되었다. 물론 쌩-도멍그 식민지의 백인과 흑인 모두 이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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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ssaint Louverture, 아이티 독립과 흑인 노예제 철폐에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식민지는 왕당파, 혁명파, 독립주의자, 흑인, 백인들로 저마다 분열되어 있었고, 북방에서 흑인들이 백인들을 학살하며 남하하고 있었다. 이 흑인 반란을 이끌던 인물 중 하나가 아이티의 독립을 이끌어 낸 인물이자, 프랑스의 노예제 철폐를 이끌어낸 장군인 투쌩 루베르튀르인데,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왕족의 후손이였다는 루머가 있었던) 해방 노예 출신의 흑인임. 반란 초창기에는 의사로써, 그리고 군 지휘관의 조언가로써 활동했지만, 후에는 반란군 최고의 군 조직자로써 군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투쌍 루베흐뛰흐는 유럽식 군사 조직과 규율을 통해 3000-4000여명의 반란군들을 통솔했는데, 이들은 군기가 개판인 다른 반란군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통제된 모습을 보였고, 전투력도 강력했기 때문에 반란군, 정부군, 그리고 식민지를 둘러싼 외세 – 대영제국과 에스파냐 왕국 – 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L’ouverture, ‘열다’, ‘개시하다’ 라는 뜻의 그의 이름도 적진의 틈을 벌려 그대로 아군을 승리로 이끄는 그의 군사적 재능에서 유래했다는 썰이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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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프랑스 본토에서는, 프랑스의 혁명, 특히 기요틴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 세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가지를 날린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유럽의 많은 군주국들, 특히 14 살이나 어린 여동생을 잃은 요제프 2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언제나 프랑스가 탐탁치않았던 대영제국,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들어선 에스파냐 왕국이 주축이 되어 대 프랑스 전선을 형성함.

프랑스 본토에서 혁명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에스파냐 총독이 쌩 도멍그의 흑인 반란 지도자들을 회유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당시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리버럴한 국가였고, 위 흑인시민권 인정 사건이 있고난 뒤, 몇년 후, 1794년 2월 4일 칙령을 통해 이미 프랑스는 자국과 식민지 내의 노예제를 금지시켜 버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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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반란 지도자였던 투쌍 루베흐뛰흐는 에스파냐가 오히려 프랑스보다 흑인 인권, 자유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내다보았고, 이에 투쌍 루베흐뛰흐는 프랑스 혁명군으로써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투쌍은 대영제국군을 무찌르는데 성공하면서 쌩도멍그의 총독이 되었고, 검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면서, 쌩도멍그는 그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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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아이티 대법원 사진

투쌍은 섬의 관리를 위해, 기술력, 특히 행정 전문가들이 많았던 백인 기득권들을 다시 섬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특히 법원에서 백인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그에 반해 흑인들에게는 강제로 자신들이 일했던 곳, 즉 노예로써의 생활을 다시 하도록 강요했다. 당연히 흑인들은 불만을 표출하며 반란을 일으키지만, 투쌍은 이를 잔혹하게 진압한다.

나폴레옹 1인 독재 체제 아래, 1802년 5월 20일 법령을 통해 프랑스 식민지 내에서 노예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데, 투쌍은 이에 크게 반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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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과 초기 13개주, 그리고 아이티가 위치한 히스파니올라 섬의 지도. 프랑스도 잘나가던 때가 있었는데, 참 아쉽다

투쌍은 섬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해나갔는데, 전에 설명했던 식민지 무역독점법을 완전히 어겨가면서 미합중국과 대영제국과 무역했다. 그 밖에도 쌩-도멍그만의 헌법을 만들기도 했고, 독자적으로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던 에스파냐를 공격해 섬을 통일하기도 했음.

당시 프랑스 혁명공화국의 대빵이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에스파냐 간의 화해-친선 무드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이런 계획에 초를 친 투쌍을 굉장히 싫어했음. 쌩-도멍그는 과도한 자치권을 누리기도했기 때문에, 아미앵 조약으로 2차 대 프랑스 전쟁이 종결되자, 투쌍이 너무 깝친다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처남에게 25000명의 군사를 쥐어주고 카리브 해로, 그리고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로 원정군을 출항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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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갖은 전쟁을 치뤘던 프랑스 혁명 공화국의 군대는 에스파냐 왕국, 대영제국의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갖고 있었고, 1802년 5월, 크레트-아-피에로 요새가 함락되고 난 뒤, 루베르튀르는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루베르튀르는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 아니였고, 더욱이 생-도멍그의 완전한 독립에 의문을 품는 동료들 때문에, 프랑스 혁명정부는 가택연금만 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루베르튀르를 프랑스에서 가장 추운 지방 중 하나인 알프스의 쥐라라는 지역의 한 감옥에, 그 어떤 사법절차도 없이, 재판도 없이 투옥시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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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생 카리브 해의 뜨거운 태양 밑에서 살아왔던 루베르튀르는, 연간 평균 기온 7도에 달하는 알프스의 한기를 버티지 못하고 몇 개월간의 투감생활 끝에 1803년, 옥중에서 병사하고 만다.

루베르튀르가 프랑스 본국으로 이송되면서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 본국에서는 생-도멍그에 노예제를 부활시키라는 명령을 원정군에게 하달한다. 이미 무장해제 당한 생도맹그 군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원정대는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즉결처형하고, 물에 빠뜨려 죽이고, 유황에 질식시켜 죽이며, 사냥개를 풀어 개밥이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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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쌍을 싫어해서 원정대에 합류했었던 흑인 지도자들은 프랑스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릴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들은 원정대에서 대거 이탈해 나갔다.

1802년 10월 13일, 프랑스의 안틸러스 제도 식민지인, 그리고 아직도 프랑스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는 과들루프에서 노예제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계기로, 생도멍그에서는 다시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흑인 장군들이 “독립군” 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투쌍의 부관이였던 장-자크 데쌀린이 장군들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으며 원정군을 강하게 압박했다.

프랑스 원정군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와 황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패배, 항복하게 되고 데살린은 생도맹그의 이름을 아이티로 바꾸고, 아이티가 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선포한다. 투쌍이 죽고 겨우 1년 후의 이야기이다. 아이티 왕국의 황제가 된 데살린은 프랑스의 2차 원정군이 두려워, 그리고 흑인 인구가 멸종될까 두려워 아이와 여성들을 포함한 3000-5000여명의 백인 거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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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전의 인구 55만의 프랑스령 생 도멍그는 30만의 아이티가 되어버렸다. 카리브 해에서는 독립과 반란에 대한 이야기에 아이티가 빠짐없이 등장하게 되었고, 탈출에 성공한 프랑스인 20000여명은, 바로 옆에있는 섬인 에스파냐 령 쿠바에 정착하게 되지만, 나폴레옹이 에스파냐를 침략하자 쿠바에서의 반프랑스인 폭동이 일어났고, 따라서 이들은 쿠바에서 도망쳐,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누벨 오를레앙, 현재 뉴올리언스에 정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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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전쟁으로 인해 돈이 부족해진 나폴레옹은, 더이상 대서양 너머로 힘을 투사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기의 딜인 루이지애나 할양을 통해, 북아메리카의 막대한 식민지 영토를 초창기 미합중국에 내다 팔게 된다. 미합중국은 루이지애나 할양과 서부 개척을 통해, 대서양국가에서 대서양-태평양의 두 바다에 두루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프랑스는 1825년이 되어서야 아이티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프랑스는 아이티에 압도적인 “독립 보상비” 를 요구했고, 이로인해 아이티는 장기간 국가파탄사태에 직면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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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아이티는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나라 대빵이 사람으로 바베큐해 죽이는 갱단 보스인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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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Hispaniola — Wikipédia (wikipedia.org)

Révolution haïtienne — Wikipédia (wikipedia.org)

Toussaint Louverture — Wikipédia (wikipedia.org)

Toussaint Louverture (1743 – 1803) – L’héritier noir des Lumières – Herodote.net

출처: 싱글벙글 지구촌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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