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기념2) 일본으로 징용 간 조선인 청년 이야기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1943년, 경상북도 영주(榮州)에 하시근(河時根)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살았다.
어느날, 군청에서 일본에 가서 일을 할 조선인이 필요하다며 마을사람들을 징용했다.
하시근의 병든 아버지가 선택되자 하시근은 면사무소로 찾아가서 자신이 대신 징용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시근은 부산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게 됐다.
조선인들은 객실이 아니라 화물칸에 밀어넣어졌다.
경상도 내륙에 살아서 바다를 본 적 없었던 사람들은 폭풍우가 몰아치자 대부분은 배멀미를 했다.
이윽고 그들을 관리할 감독관이 내려왔다. 그는 키가 컸고 다부진 체격에 냉소적 눈빛을 한 사내였다.
‘내 이름은 야마모토다. 난 이제부터 너희들이 내지(內地)에서 천자님(천황)를 위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감독할 것이다.’
하시근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사슬에 묵인 채로 규슈 산골짜기에 있는 탄광까지 걸어서 가야 했다.
황국의 2등신민들은 내지에서 열차를 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시근은 이제부터 창씨개명 때 받았던 일본이름인 가와모토(河本)로 불렸다.
‘와레라와 고오고쿠 신민나리, 추세이 못떼 군고쿠니 호오젠….’
일장기가 게양된 마당에서조선인들은 일본어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외워야 했다.
야마모토는 다른 조선인 조수 2명과 함께 징용된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야마모토는 조선인들에게 탄광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러자 뒷열의 어떤 조선인이 소리쳤다.
‘우리는 원래 조선소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알고 왔소, 왜 말이 바뀌는 거요?’
‘네 놈은 이름이 뭐냐, 조선인?’
‘김동인(金東仁)이오’
김동인이라는 그 남자는 왜 계약조건이 통보도 없이 바뀌었는지 조목조목 따져물었다.
야마모토는 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조선이름 말고 일본이름을 대라!’
‘난 조선인이오, 일본이름 따윈 없소!’
‘좋다, 네 놈을 기억해두마’
하시근과 조선인들은 탄광 깊숙히 내려가서 탄을 캐는 막장에서 일하게 됐다. 갱도는 매우 뜨거웠고 조선인들은 훈도시 하나만 입고 석탄을 캐냈다.
그에 비해 대우는 형편없었다. 밥은 콩깻묵과 보리밥이 섞여서 나왔고 반찬은 염장한 정어리와 단무지 뿐이었다.
조선인들은 매달 2원의 임금을 받았으나 절반은 강제로 저축되었고 영수증은 지급되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그 돈이 조선의 가족들에게 보내질 것이라고 했으나 그걸 받았는지 알길은 없었다.
만약 일을 하다 조금이라도 장비를 망가뜨리면 가차없이 매질을 당하고 임금을 받지 못했다.
야마모토의 부하중에는 강원범(廣元範)이라는 조선인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아오키(青木)라고 불렀고, 일본인들에게 충성심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조선인들을 툭하면 구타하며 가혹하게 대했다.
히로타(広田)라고 하는 일본인이 있었다. 등에 문신이 가득한 걸로 봐서 사회에서 야쿠자였던 것 같았다.
는 항상 건들건들 다녔고 역시 틈만 나면 재미를 위해서 들고 다니는 목도로 조선인들을 때렸다.
탄광 안에서는 낙석, 가스폭발 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안전장치라고는 전혀 없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일을 버티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치고, 죽어갔다. 몸이 상해서 끙끙 앓다가 죽는 이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일본인 광부들은 다치면 병원으로 보내졌지만 조선인들은 숙소에서 간단하게 치료만 받을 뿐이었다.
죽은 조선인들은 모두 탄광 뒤편 폐석산에 묻혔다
조선인들은 갈수록 의욕이 떨어졌다. 집에 보내는 편지는 하나같이 검열당해서 안부만 겨우 물을수 있었다.
김동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동료들을 위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동인을 중심으로 뭉쳤다.
하시근 역시 김동인에게 많이 의지했다.
어느날 하시근과 동료들은 외출을 허가받았다. 그들은 근처의 조선인 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마을은 산기슭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정착한 곳이었다. 그 곳의 이름은 ‘아리랑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주막에는 할머니 한분이 조선요리를 팔고 계셨다.
‘자네들 징용 당해서 왔당가? 다들 힘들겠구먼.’
할머니는 된장국과 깍두기, 배추김치, 민물게장등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주셨다.
몇달 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본 적 없던 하시근과 동료들은 걸신 들린듯 밥을 먹어치웠다.
주막에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어떤 남자는 자신을 황정수(黃錠壽)라고 밝히더니, 하시근과 동료들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을 찾으라고 말하며 지도를 하나 그려줬다.
하시근과 동료들이 할머니의 따뜻한 배웅을 받고 돌아가던 중, 안선호(安先浩)라는 자가 갑자기 멈추더니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난 집에 마누라랑 자식들이 있어, 저기서 계속 일하다가는 언젠가 죽고 말거야.’
‘어디로 가려고요?’
‘모르겠어, 아까 받은 그 지도 나한테 줄 수 있어?’
‘그럼요, 이 돈도 가져가세요.’
하시근과 동료들은 안씨에게 지도와 돈을 건네줬다. 그는 뛰어가다가 돌아서서 연신 절을 하며 멀어졌다.
탄광 숙소로 돌아온 그 날 밤, 마당에서 누군가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아까 도망쳤던 안씨였다.
야마모토의 부하들은 안씨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그를 도와줬던 하시근과 다른 동료들도 불려나가 똑같이 두들겨 맞았다.
‘저 놈 돈이 꽤 많이 있더군. 네놈들이 도와줬나?’
야마모토는 뱀 같은 눈으로 하시근을 쳐다보며 추긍했다.
안씨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며 소리를 질러대다가 강원범이 휘두른 통나무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때리지는 않고 지켜만 보던 야마모토가 이렇게 외쳤다.
‘잘 봐둬라, 도망치려는 놈은 이렇게 될거다!’
안씨는 거적데기에 쌓여 어디론가 실려갔고 그 뒤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걸 본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제일 배짱이 좋고 말을 잘했던 김동인을 필두로 하여 조선인들은 파업을 하기로 했다.
무더운 여름날, 조선인들은 일할 시간이 되어도 탄광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앉아 침묵으로 시위를 하였다.
야마모토와 부하들은 화가 났지만 조선인들이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섣불리 폭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좋다, 너희들의 요구사항을 말해봐라’
김씨가 대표가 되어 야마모토와 사무실에서 협상을 하러 들어갔다. 조선인들은 일이 제대로 안풀리면 어쩌나 웅성거렸다.
‘그냥 있지만 말고 노래라도 부르는게 어떨까요?’
‘무슨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아리랑을 부르죠, 그건 모두 다 알잖아요’
조선인들은 모두 같이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만리타향에서 오랜만에 고국의 노래를 부르자, 누군가는 울기도 했고 누군가는 손뼉을 치기도 했다.
조선인 간수들은 차마 따라 부르지 못하고 건물로 숨어버렸다.
그 때 트럭이 한대 도착하더니 목도를 든 일본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조선인들에게 욕을 하며 둘러싸기 시작했다.
팔에 문신을 한 한명이 맨 앞의 조선인의 머리를 목도로 후려갈겼다. 그 조선인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때 하시근과 다른 동료들이 목도를 든 일본인을 붙잡고 찍어눌렀다. 다른 조선인들도 싸우기 위해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주춤하고선 덤비질 못했다.
그때 협상을 하러 들어갔던 김씨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는 이겼다는 뜻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모두 만세를 외쳤다.
그 뒤로 식사의 양도 늘고, 작업시간도 단축되는 등 어느정도 조선인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않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김씨는 조선인들을 대표해서 다시 한번 협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협상을 하러 갔던 김씨는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 땀을 흘리며 돌아왔다. 아마도 협상에 실패한듯 보였다.
하시근은 김씨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김씨는 흰색 한복을 차려입고 대들보에 목을 메어 자살했다. 숙소의 모든 조선인들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시근은 김씨의 사타구니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시근은 그제서야 어젯밤 야마모토와 부하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건지 깨달았다.
김씨는 수치심과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달 뒤, 야마모토가 하시근을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와모토, 네 놈은 조선놈들 중에서 일본어를 제일 잘 하더군? 너도 관리인이 되어보는건 어때?’
관리인이 되면 확실히 지금보다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하시근은 동료들을 때려죽인 야마모토와 부하들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싫어요. 같은 동포를 괴롭히면서까지 편하게 있고 싶진 않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야마모토의 부하들이 하시근을 두들겨 팼다. 야마모토는 눈동자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시간을 줄테니까 한번 생각해보라고.’
야마모토의 권유를 거절한 뒤로 하시근에게는 매일같이 중노동과 폭행이 가해졌다.
그가 있던 방은 원래 5명이 함께 지냈지만 1년이 흐르자 대부분 죽고 하시근 혼자만 남게 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다 죽은 조선인은 20명이 넘었다.
하시근은 더 있다가는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하시근은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순찰을 돌던 히로타에게 걸리고 말았다.
‘여어, 가와모토! 네놈도 도망치려는 거냐? 건방진 놈!’
히로타는 목도로 하시근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절박해진 하시근은 히로타와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그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수영을 하며 저번에 갔었던 아리랑 마을에 도착한 하시근은 주막의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이고, 이게 누군가? 저번에 그 청년 아니여? 꼴을 보니 도망쳐 온게로군.’
할머니는 하시근을 숨겨주고는 먹을 것과 갈아입을 옷을 내주었다. 다행히 순사들은 아리랑마을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주막 할머니의 도움으로 하시근은 저번에 지도를 줬던 황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하시근을 다른 곳으로 빼내주겠다고 했다.
황씨는 본래 전라도 출신으로, 넝마주이였으나 일본으로 건너 와 이런저런 일을 한 끝에 운수업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조선으로는 안 돌아가실겁니까?’
‘안 돌아가. 가봤자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그는 하시근을 후쿠오카 인근의 공사장에 데려다주었다. 하시근은 그곳의 조선인 십장 밑에서 일하게 됐다.
이곳에서 하시근은 제주도 출신의 서진철(徐鎮徹)이라는 사람과 친해졌다.
그는 다리 한쪽을 절었지만 사람이 좋았으며, 하시근에게 여러가지를 가르쳐주며 많은 것을 챙겨주었다.
일은 흙을 삽으로 퍼서 나르는 평범한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과거 탄광에 비하면 100배는 나았다. 임금 역시 꼬박꼬박 나왔다.
일하는 곳에는 일본인 여자들도 있었다. 남자들이 전부 전쟁터로 끌려가서 대신 흙을 나르는 등 남자들의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조선인 인부들은 일본인 여자들을 ‘왜년’이라고 부르며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하시근은 그 중에 꽤 예쁜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하시근은 가끔씩 그녀에게 한두마디 씩 말을 건넸다. 그녀도 하시근을 조선인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처음에는 한두마디로 시작했던 것이 나중에는 서로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일이 끝나면 제방을 걸으며 함께 집에 가게 됐다.
서씨와 다른 조선인들은 하시근이 그녀에게 관심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년들은 조심해야 돼.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거든’
그녀의 이름은 사토 치즈루(佐藤千鶴)였다.
치즈루는 유부녀였으나 남편은 전쟁에 나갔다가 저 멀리 남방에서 전사했고 현재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당신 이름은 뭔가요?’
‘가와모토요’
‘그건 일본이름이잖아요, 조선이름은 뭐예요?’
‘강 하(河)에 때 시(時), 뿌리 근(根)을 써서 하시근이라고 해요.’
비가 와서 일을 쉬는 날에는 둘은 바닷가에서 만나 하루종일 이야기를 했다. 치즈루는 조선에 대해서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물어봤다.
조선인 동료들도 하시근이 일본여자와 사귄다는 걸 눈치챘지만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하시근이 일본으로 끌려온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 8월 중순 라디오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들은 십장은 ‘전쟁이 끝났다, 조선이 해방됐다’라고 알려줬다.
하시근은 치즈루를 찾아가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제 해방이 됐으니 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그렇다면 나도 당신을 따라 가겠어요. 조선인으로 여기서 사는 것보다는 내가 당신과 함께 조선에서 사는게 나을거예요.
치즈루는 하시근의 생각보다 훨씬 강단이 있는 여성이었다.
하시근은 치즈루를 데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정식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둘은 잠시 아리랑마을에 들러서 몇 주를 지냈다.
주막 할머니는 치즈루에게 자신이 젊었을 때 입던 한복을 내어주고 머리도 조선여인처럼 올려주었다.
서씨는 치즈루를 영 탐탁치 않게 바라보았지만 둘을 위해서 부산으로 가는 밀항선을 잡아주었다.
‘난 일본여자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자네 생각까지 반대하진 않겠네, 돌아가서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하시근과 치즈루는 부산에 도착하여 기차로 경상북도 영주까지, 그리고 마을까지 걸어서 2시간을 걸어야 했다.
마을 근처 개울에 다다랐을 때, 강가에서 동네사람인 이(李)씨 영감이 하시근을 알아보았다.
‘자네 하씨네 막내아들 아닌가?’
‘할아버지, 안녕하셨어요?’
‘징용 갔다가 돌아왔구먼! 빨리 집에 가보게! 자네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네’
그 말을 들은 하시근은 다시 인사를 드리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일행이 떠나자 이씨 영감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본여자랑 결혼을 한겐가…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겠네.’
‘어머니, 저예요. 시근이가 왔어요.’
‘아이고! 우리아들,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머니, 제 아내될 사람입니다. 이름은 천학(千鶴)예요.’
하시근은 어머니와 만주에서 돌아와있던 형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형은 일본인인 치즈루를 대놓고 싫어했다.
아버지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나서 형은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 집에 왜년을 들일 생각 없다. 우리 집 평판이 어떻게 돼겠냐? 정 저 여자와 살고 싶거든 집을 나가거라’
하시근은 치즈루에게 사실을 전했다. 그녀는 자신이 홀대받는 것보다 그가 주눅이 든 것을 더 걱정했다.
‘형님이 집을 나가라고 했어요.’
‘그럼 저흰 이제 어떻게 하죠?’
‘걱정마세요. 어떻게든 살 방법이 있겠죠.’
하시근과 치즈루는 강가에서 봤던 이씨 영감을 찾아갔다. 그는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씨 영감은 흔쾌히 별채를 내어주었다. 안그래도 혼자 살기 심심했던 참이었다고 했다.
반쯤 무너졌던 별채를 고치고 하시근과 치즈루는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들도 태어났다. 하시근은 아들에게 하시영(河時榮)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씨 영감은 일본어를 할 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치즈루를 차별하지 않고 며느리마냥 대해주었다.
둘은 잠깐이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시근이 일을 하러 며칠 나가있던 사이, 치즈루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와 치즈루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이씨 영감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막무가내로 데리고 가겠다는데 내가 막을 도리가 없었어,
사실 자네 부인과 아들은 여기서 일본놈이라고 박해박으며 사는 것보다 일본에서 사는게 더 나을 걸세’
하시근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 말이 맞았다. 일본인의 피를 가진 아들이 해방된 조선에서 출세하긴 불가능했다.
치즈루가 남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당신과 함께 해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당신을 따라 조선인이 되고자 했지만 세상은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나봅니다.
하지만 저는 바다 건너에서도 평생 당신의 아내로 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さようなら).’
하시근은 치즈루를 찾기 위해 부산항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고 이미 해협을 건너간 것 같았다.
하시근은 절망하며 치즈루의 편지를 태워버렸다. 그러고는 남은 돈을 털어서 부산에서 행상을 하며 살았다.
몇년 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고향은 쑥대밭이 되었다. 형님과 어머니, 그리고 그를 도와줬던 이씨 영감은 인민군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잠시 고향으로 올라가 이씨 영감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과거를 모두 잊기로 한 하시근은 악착같이 돈을 버는데만 매달렸다.
그의 노점좌판은 구멍가게가 되었고, 구멍가게는 이윽고 경상도 전체에 지점을 둔 마트 체인점이 되었다.
하시근은 이제 ‘하 회장’으로 불리었다. 정재계 인사들과도 연줄이 생겼고 부산 시내에 큰 건물과 본사를 두었다.
그 사이 재혼도 하였고(주: 원작에서는 위안부 피해여성과 결혼했다고 나옴.) 아들은 셋이나 두었다.
하시근은 가끔씩 대한해협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코 배를 타고 그 바다를 건너가지는 않았다.
(이게 중반까지의 스토리임. 길어서 여기서 끊음.)
세번째 건너는 해협(三たびの海峡, 1995)
일본의 소설가 하하키기 호세이(帚木蓬生)의 소설원작. 작가가 본업이 의사인데, 진폐증에 걸린 조선인 탄광 징용자들을 치료해주던 인연을 계기로 집필했음.
영화는 ‘하치 이야기’로 알려진 감독 코우야마 세이지로(神山征二郎)가 메가폰을 잡고 원로배우 미쿠니 렌타로(三國連太郎)가 늙은 하시근을 맡았음. 치즈루를 맡은 배우는 80년대 일본을 풍미했던 아이돌 미나미노 요코(南野 陽子)임. 조선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전부 재일교포와 한국인들로 캐스팅함. 내용이 내용인지라 일본기업들로부터 투자를 못받아서 찍지 못하던 와중에 민단과 신한은행이 출자해서 10억엔의 제작비를 대줬다고 함.
일본영화 최초로 한국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한 작품이기도 함. 감독은 당시 한국인들한테 맞아죽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일감정이 강하지 않았다고 함.
영화는 1995년 일본에서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했고, 주연배우인 미쿠니 렌타로는 이 작품으로 일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함.
감독은 이 영화를 한국에서도 꼭 개봉하고 싶어했고, 신한은행의 주선으로 배급사와 개봉관, 주연배우들 내한, 시사회 날짜까지 모두 잡아놓은 상태였음. 시사회에는 한국 문화-정재계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음.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에서는 일본영화를 수입 및 개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상영불가 판정을 내려버림. (주: 실제로 일본영화가 한국에서 정식개봉하게 된 시기는 3년 뒤인 1998년부터였음.)
신한은행 측은 작품의 의의와 감독의 기획의도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으나, 문화체육부의 입장은 ‘뭐가 됐던 간에 선례가 없으니 절대로 안된다’라며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이 영화는 결국 한국에서 개봉하지 못하게 됨. 예정되어 있던 시사회는 당연히 물거품이 됨. 이 때문에 감독은 매우 실망했다고 함.
이후 감독은 약 10년간 민단 주선으로 일본 전역에서 재일교포들을 대상으로 이 영화의 무료상영회를 열었다고 함. DVD 코멘터리에서도 ‘이 나라가 우경화 되어가고 있지만 역사를 잊지 않은 일본인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멘트를 남김.
참고로 중간에 조선인 징용자로 나오는 엑스트라들 중에는 ‘타짜 철웅좌’로 유명한 배우 김응수가 등장함. 엔딩 크레딧에서 이름도 확인함.
배우 본인이 9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영화학도로 유학하던 중에 찍게 된 걸로 추정됨. 배우 필모에는 나오지도 않는 작품이지만 꽤 의외였음.
출처: 군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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