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내 증시 30% 움직였지만…사상 최고 체납액 기록했습니다”
‘광화문 곰’ 고성일
토지 보상비 500억
개인 사상 최고 국세 체납
한때 한국 사채시장을 주름잡던 3인방은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자리 잡은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등도 무서워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막대한 현금을 유통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사채시장을 꽉 잡고 있었던 3인방은 ‘명동 백 할머니’로 불리는 백희엽, ‘현금왕’ 단사천, 마지막으로 한때 한국 증시 30% 움직였던 ‘광화문 곰’ 고성일이다. 고성일이란 이름보다 ‘광화문 곰’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한 인물로, 주식시장의 큰 손으로 알려졌다.
고성일은 앞서 말한 ‘현금왕’ 단사천, ‘백 할머니’ 백희엽 씨와 함께 북한에서 넘어와 명동 사채시장을 주름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명동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들을 ‘38 따라지’로 부른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 따르면 고성일은 어릴 적부터 장사 수완을 타고나 광복 직후 월남해 무역 회사를 차린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암달러 시장의 주 무대로 꼽히던 남대문시장에 수도 염료 상사라는 회사를 차려 옷을 염색하는 원료인 염료를 수입해 내다 팔았다.
장사 수완이 좋은 덕분인지 당시 20억 원에 이르던 염료 시장을 그가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이에 기존 가격 대비 수십 배의 시세 차익을 남기면서 염료를 판매할 수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고성일을 재벌이 무서워하는 ‘광화문 곰’으로 만든 것은 무역업이 아니다. 사업으로 성공한 뒤 부동산에 관심을 가진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수도권 등지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한때 개인 부동산 소유 1위라는 타이틀도 거머쥐며 그를 아는 사람들은 “고성일의 땅을 밟지 않고는 서울로 들어올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막대한 땅을 보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성일의 탁월한 능력은 여기에서 증명됐다.
돈 냄새를 누구보다 잘 맡은 고성일의 예상이 적중해 1980년대 강남 개발 붐이 일자 토지보상비로만 500억 원이란 거액을 손에 쥔 것이다. 당시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기 버거울 정도의 돈을 거머쥐며 엄청난 부를 일궈냈다. 이후 융통할 수 있는 현금 자산이 거액으로 불어난 고성일은 1970년대 후반 증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지난 1978년 고성일은 100억 원이라는 돈을 들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1970년대 국내 주식시장이 ‘돈 넣고 돈 먹기’ 식의 투기 광풍이 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에는 상장 주식이 몇 종목 되지도 않은 데다 거래량도 많지 않아 종목들이 급등락을 반복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 기준 상장회사는 5개 시중은행을 포함해 모두 15개에 불과했으며, 순수 민간기업은 5개밖에 안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그가 명동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펼쳐나갔다는 점 역시 증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요건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당시 증권거래소가 서울 명동에 자리 잡고 있어 자연스레 명동 큰 손들이 주식시장으로 돈을 굴리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 말 건설주가 주식시장에 붐을 일으켜 일명 ‘중동 붐’으로 인해 건설사들이 주목을 받으며 고성일 역시 건설주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넣었다. 1980년 건설사 주식을 대거 사들인 고성일은 광화문에 사무실을 차리며 ‘광화문 곰’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이는 그가 사들이는 주식마다 가격이 급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하루 주식 거래대금의 3분의 1은 광화문 곰의 돈”이라는 말이 나돈 영향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고성일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 중 하나로 자리 잡은 SK의 유공 주식을 매집한 고성일은 기대와 달리 주가가 지속 떨어지며 막대한 금액을 잃게 됐다.
또한, 당시 시기가 활황이 끝나고 침체기로 돌아선 상황이었으며 외국인 투자가 단계적으로 허용되며 예전 같은 높은 차익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수억 원대의 투자금 회수를 한 덕분인지 거듭되는 투자 실패에도 고성일은 멈추지 않았다.
이에 실패로 인해 자신의 자본금이 비어 나가게 되자 금융기관에 손을 내미는 등의 상황을 맞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더불어 1991년 한보철강에 대한 시세조작 혐의로 고발당하고 이듬해 23개가 넘는 신용금고에서 제삼자 명의로 불법 대출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며 그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한편, 고성일은 죽기 직전까지도 빚을 갚기 위해 노른자 땅을 팔아야 할 정도로 빚에 쪼들리고,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178억 원에 달하는 개인 사상 최고 국세 체납액을 기록하는 등 순탄치 못한 말년을 보낸 것으로 판단된다. 이어 고성일은 지난 1997년 향년 77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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