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저력을 보여준 전설적 전투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짜빈동 전투는 베트남 전쟁때 일어났던 전투로
1967년 2월 14일 발렌타인때 베트남 쾅나이성 짜빈동의
청룡부대 11중대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열한중대라고 해병들 사이에서 불린다고 한다)
당시 한국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던
쾅나이성 일대는 베트콩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여 미군이 작전에 애로사항을 느끼던 곳으로
이에 한국 제2해병여단이 이곳에 배치되어
지역평정작전을 수행중이었다.
파병당시 VC의 활동이 대단히 활발하여
산발적 교전이 발생하기
일쑤였고 종전의 전투로 미군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았던바
한국군은 지역지형정찰 및 대민활동을 통해
베트콩을 억누르려면 지역민을 휘어잡아야 한다,
즉 베트콩이 물고기면 지역민은 병력과
식량을 보급하는 물이라는 판단하에
지역민들을 보호하고 방어선 내로 들이는 작전을 벌인다.
당시 지역주민들도 낮에는 미군,
밤에는 베트콩에 시달리던바 처음에는
한국군을 믿지 못하여 협조하지 않았으나
점차 한국군의 대민활동에 안심하게되어
많은 수가 한국군 보호내로 들어오고
(최대 120만명이 한국군 보호하로 들어오기도 했다.)
한국군은 이를 중대전술기지를
곳곳에 구축하여 지켰는데
미군은 그 규모가 작아 베트콩에게 각개격파당할
우려가 대단히 높다고 우려를 표했었다.
실제로 한국군도 1967년 1월 짜빈박 전투에서
32명의 전사자를 내며
사실상 패배한 전투를 한적이 있어 반드시
갚아주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
당시 참전 해병증언에 따르면 짜빈동 전투가
바로 이를 위한 전투였다고 한다
1월에 벌어졌던 무참한 짜빈박 전투의
핏값을 어떡해서든 물어내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해병대원들이 일부러 주변 주민들에게
열한중대의 중대전술진지가
방어가 약해졌다며 소문을 퍼뜨리고 진지를
허술하게 보이도록 조치를 취했다는것.
하지만 실제로는 해병대 중대전술기지는
참호가 보강되고 곳곳에 크레모아를 설치하고
토끼굴을 팠으며 수류탄 줄에
수류탄을 줄줄이 걸어서 보강한 상태였다.
최소 3일치의 식량을 구비하고
조명탄과 포탄을 적재하고 곳곳에
적들이 침투할만한 구역에 포격 연습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며
통신선과 수색조 및 청음초를 강화했다.
하지만 당시 해병대는 아직 m16이 아닌
2차대전때 쓰던 m1소총이나 bar등으로
무장하고 있어 보병화력에서는 객관적으로
베트콩에 밀리는 무장을 하고 있었던게 아쉬운점.
이윽고 해병대가 나 약해요 라며 야한 냄새를 베트콩이 섞인
양민들에게 잔뜩 풍겨서인지 베트콩은 참지 못하였고
또한 미군의 동맹군을 박살내어 전쟁 국면을
뒤집을 호기로 본바 대규모 공격을 결심한다.
아군의 근거리 정찰결과
“가까운 시일내에 적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된다” 는
정보가 들어오는데 사실 이때 너무 많은 허위정보가
하루에도 수십개씩 들어와
무엇이 맞는지는 알기 어려웠으나
약점을 지어내 적에게 보였으니
얼마전 승전한 베트콩이 곧 공격하리라 예상했다.
짜빈박 전투 이후 얼마안된
발렌타인 데이인 2월 14일 새벽,
안개가 자욱히 끼자 정경진 중대장은
“베트콩이 항상 날씨가 안좋을때 기습을 했으니
오늘일수도 있겠다” 며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청음초에서 무기를 갖추고
진지개척을 위한 폭발통을 들고오던
적들을 공격하였는데 적들은 시체 1구를 남겨두고 도주한다.
이때가 밤 11시 20분.
(정경진 당시 중대장과 월터 준장)
당시 정경진 중대장은 휘하 병사들에게
적들이 올 가능성이 높으니
전투화를 벗지말고 누워있으라고 명령을 한다.
적이 들켰으니 오늘은 물러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던 그때
새벽 4시 10분부터 베트콩의 공격이 시작된다.
3소대 병사가 청음초를 서다가 베트남인 특유의 체취를 맡고
조명탄을 터뜨려달라고 했고 정경진 중대장은 이에
“절대 마구잡이로 쏘지말고 최대한 가까이 다가오게 한뒤
일격필살하라” 고 말한다.
이윽고 조명탄이 터지자 눈앞에 보인건
엄청난 수의 베트콩이었다.
적들은 자동소총은 물론이고 소련제 기관총과 박격포,
무반동포, 곡사포의 포격까지
지원받으며 중대전술기지로 밀고들어왔다.
당시 참전해병 말로는
“조명탄이 터지자 베트콩들이 앞에 새카맣게 오고있더라” 며
말했다.
이윽고 한국 해병대 화기가 불을뿜자 적들이 수수단 넘어지듯
넘어지는게 눈앞에 보였는데
크레모아가 터지고 기관총에 죽어도
적들은 시체를 밟고 계속 밀려들어왔다.
김세창 중위는 군데군데 냇가에 낮은 둔덕에
적이 은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해병대 포병 7중대에게 효력사로
의심지역에 요란한 포격을 가했고
이곳에 있던 베트콩 부대가
이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원 전체가 전방에 사격을 가하며
결사항전했지만 이쪽은 중대이고
베트콩은 연대규모로 강화된 부대인지라 숫적차이와
화력차이가 커서 결국 방어선 곳곳이 뚫리기 시작한다.
1소대와 전방 3소대 방어선이 곳곳에서 뚫려
적과 아군이 섞이는가 싶더니
곳곳에서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찌르고 때리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욕설과 비명과 격투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진지가 다 뚫렸다고 판단한 해병 2여단 본부는 영내포병사격인
브로큰 애로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4.2인치 박격포 소대도 후방에 있었음에도 공격을 받아
박격포를 숨길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기관총 사수가 탄이 다 떨어졌음에도 비키지 않고
계속 방아쇠를 당기고 있자
부사수가 탄을 갈려고 말을 걸어보니
이마에 빨간 구멍이 나있더란 말도 있다.
(3소대와 1소대로 밀고 들어오는 적 등 당시 상황)
이학현 일병은 두다리에 부상을 입어 기어서 후퇴중
중대 오물통에빠져 허우적거리는 베트콩 5명을
보고 다시 거기로 기어가서
수류탄을 오물통에 까넣어 5명을 폭사시켰다.
그후 교통호등에서 싸우다 적을 한명이라도 더 죽여야한다며
외친뒤 적을 끌어안고 수류탄을 뽑아 산화했다.
김명덕 일병은 총을 내려두고 수류탄을 걸어놓은 줄에서
연신 수류탄을 뽑아 전방에 정신없이 투척했다.
적이 너무 지근거리에 있다보니 총을 쏘기보단
수류탄을 던지는게 효과적이었기에.
송영섭 일병은 기관총을 쏘다가
적탄에 6발을 맞고 중상을 입고
적이 계속 진내로 뛰어내려오자
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총열을 뽑아 수풀속에 집어던지고
수류탄을 이용해 자폭한다.
그렇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며
중대전술기지가 넘어갈뻔했지만
다행히 날이 밝으며 상황은 반전된다.
큰 피해를 입으면 물러나리라 생각했던
한국군이 끝까지 저항하며
큰피해를 입히고 날이 밝으며
미군의 공군지원이 염려되었던
베트콩이 등에 총을 맞으며 지리 멸렬하게
후퇴하기 시작한것이다.
오전 7시 20분경이었다.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기지외곽에서 저항하던
베트콩 중대병력이 북서쪽으로 도주한다.
해병여단은 그쪽으로 화력을 집중하여 최대한 격멸시킨다.
적들은 전사하거나 부상한 베트콩들을 간이들것이나 등에 업고 후퇴했다
날이밝자 여기저기 흩어진 베트콩들의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살된적은 243명 포로 2명 이었고
추가로 많은 적이 포격으로 사살되었다.
확인된 시신중에는 적 1연대 90 대대장을 포함한 다수의
적장교도 포함되어있었다.
적들은 민병대가 아닌 전투중 여러차례
지원병력으로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었고
이 패배는 북베트남군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호치민은 짜빈동 전투결과를 듣고
한국군을 만나면 일단 후퇴하고
인민의 재산과 병력을 보호하며
100프로 자신이없으면 전투를 피해라고 하였고,
다른 북베트남 장군들도
“여지껏 싸워온 남베트남군, 미군, 태국군등과는 많은점이 다른 군대”
라며 소상히 조사할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전투소식을 들은 월터장군은 직접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와 전투현장을 보고
정경진 중대장등 병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
또한 미군은 이 전투를 연구하여
미군전술에 대입시켜 차후 써먹게되며
중대전술기지의 효과에 고개를 끄덕이게된다.
또한 미군사이에선
” 한국군은 같은 동양인이라 베트콩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거나
“냄새만 맡고도 맞히더라” 며 신기함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베트콩 “우리에게는 정글이 있다”
미국 ” 우리에게는 한국군이 있다”
같은 밈이 생기기도 했다.
아군에서 전사하신분은 아래와같다.
11중대
하사 강경희
병장 김남섭
상병 이학현-(1945.12.15~1967.2.15) 충남 연기 출생.
1965년 7월 해병 신병 제167기로 입대하여 전사할 당시 일병이었으며,
전투도중 적군이 쏜 총에 오른쪽 발목이 관통당한 직후
자신의 총을 동료인 도성룡 일병에게 넘기고 나서 적군 한 명이라도 더 제압해야 한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서
그 직후 교통호에 쳐들어온 적병 다섯명을 껴안은 후 수류탄을 가지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1968년에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 2월의 호국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내부엔 이학현 상병의 이름을 딴 이학현관이 존재한다.
건물 내부엔 이학현 상병의 큰 초상화가 걸려있다.
상병 최흥식
일병 도성룡
일병 이중석
일병 양영호
일병 조정남-(1945.1.10~1967.2.15) 경남 밀양 출신.
1966년 1월 해병 신병 제173기로 입대했으며
제 3소대 1분대 소총수로서 당시 부대원 10명과 함께
청음초 근무를 조장을 맡아서 수행하고 있었다.
적 1개 중대가 공격을 시도하려는 것을
최초로 목격하고 공격을 시도하였고,
악조건 속의 전투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희생정신을 보여 주었지만
중과부적으로 인해서 분대원 단 1명을 남기고 본인을 포함해 대부분이 전사하고 말았다.
전사 당시 3명의 적이 교통호를 따라 접근해 오자
그는 수류탄을 터뜨려 그들과 함께 폭사했다.
이 공적으로 인해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고 상병으로 특진되었다.
그후 2006년 11월의 호국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일병 송영섭
전술했듯이, 총을 지키기위해 총열을 뽑아 숲속에 감춘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수류탄을 양손에 까들고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적4~5명이 자신의 몸에
손을대는 순간 자폭하여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병 김동재
일병 이내수
이병 오준태
1대대 1중대 3소대 (4명)
병장 김희도
상병 이다성
상병 김정석
일병 오정규
중포소대 (1명)
일병 오용섭
한편 베트남은 이 전투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한국군 기지로 쳐들어가서 600명을 사살했다는것.
학살행위 자체도 사실무근이지만 중대규모 기지에 쳐들어와서
600명을 사살했다는것도 말도안되는 헛소리다.
중대전술기지에 쳐들어와서는 600명을?
이 전투는 한국 해병대의 전설로 남았으며 해외 외신들도
미군을 포함한 누구도 해내지 못한일을
한국군은 단 몇달만에 해냈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출처: 군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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