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블랙리스트’ 오른 한강 작가 도왔다는 정부 기관, 이곳이었다
문체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
한강 작가 작품 中 6권 번역
“국가 차원의 번역 지원 미미”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 그의 작품에 범국민적인 관심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경기도교육청이 그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유해 도서로 지정해 폐기한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어서 충격이다. 이와 더불어 한강 작가가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점도 함께 논란이 되고 있어 이목이 쏠린다.
지난 5월 강민정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경기도교육청 성교육 도서 폐기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경기도 학교 도서관에서는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성교육 도서’란 명목으로 2,528권이 폐기 처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공개된 폐기된 책 목록에는 한강의 작품 ‘채식주의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논란이 확산하자 경기도교육청은 “일부 단체가 학교에 무분별하게 공문을 보내 성교육 도서 폐기를 요구한 것”이라며 “교육청은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현황을 단순히 조사한 것이지 폐기하라는 지시가 아니었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한강 작가의 작품이 폐기됐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한 네티즌은 국민신문고를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조속히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다시 배치하고, 청소년들의 권장 도서로 지정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민원을 경기도교육청에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더불어 한강 작가가 과거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분류된 사실 역시 재조명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란 박근혜 정부 시기 정권에 비판적 혹은 견해를 달리한 문화·예술인을 억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명단으로, 당시 한강 작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룬 ‘소년이 온다’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에서 배제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을 수사한 특검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지난 2016년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뒤 ‘한강에게 축전을 보내달라’는 문체부 요청을 청와대가 거부했다는 문체부 관계자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이어 지난 2014년에는 문체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세종도서 지원 사업에서 ‘소년이 온다’가 마지막 3차 심사에서 ‘사상적 편향성’이 지적되고 최종 탈락하기도 했다.
다만, 한강 작가의 작품 발행을 도왔다는 정부 기관 역시 존재했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번역원)으로, 이들은 당시 정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강 작가를 비롯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작가들을 우회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3일 번역원은 2001년부터 현재까지 44개 언어권에 총 2,171건의 번역·출간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몇 년간 번역원이 지원했던 작품들은 국제 문학상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3년 연속 최종 후보로 오른 정보라의 저주토끼(2023)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2024)로, 한국 문학의 글로벌 인지도와 수요 증가를 견인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출간 종수가 가장 많은 영미권(미국, 영국)과 일본어권, 프랑스어권에서 특히 두드러진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2024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한강 작가 역시 지난 2023년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상을 받기도 했다.
한강 작가가 수상한 메디치 상의 경우 프랑스의 4대 문학상 중 하나로, 한강 작가는 한국인 최초로 이 상을 받으며 프랑스 내에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에밀기메 아시아 문학상까지 받은 바 있다.
이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유정 의원이 지난 12일 번역원으로부터 받아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이래로 한국 작가들이 총 31회 국제문학상을 거머쥔 것으로 파악됐다.
연도별로는 2017년 3건, 2018년 5건, 2019년 2건, 2020년 6건, 2021년 4건, 2022년 5건, 2023년 1건, 2024년 4건 수준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수상이 안타깝게 불발된 입후보까지 합하면 총 97건에 달한다. 특히 한강 작가의 작품 중 대다수가 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에서 출판되었으며, 일각에서는 작품의 좋은 평가와 확산에 번역원이 크게 기여했다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당초 한강이 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다룬 ‘소년이 온다’가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문화교류 행사 지원 배제 지시 대상이 됐으나, 번역원은 이 같은 정부의 배제 지시를 따르지 않고 한강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어 번역원이 주도한 번역의 질 역시 좋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어 한국 문학에 번역원이 기여한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번역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 중 총 6권을 번역해 한강 작품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한편, 문학계에서는 한국문학이 세계 독자들과 더 가까워진 배경엔 한국문학 번역 지원사업이 컸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최근 5년(2019년~2023년) 사이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출판 지원사업’ 예산은 약 18억 원에 그쳤다.
올해는 20억 원으로 소폭 늘었으나 더 많은 한국 문학을 해외로 소개하고 양질의 번역출판을 유도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 강유정 의원은 “전 세계 한국 문학 독자를 확대하고 문화 저변을 넓히려면 국가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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