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병철·정주영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남자의 정체
대농그룹 故 박용학 회장
미도파백화점 유통 사업 확장
‘재계의 마당발’·정주영 술친구
1960년대 화신 백화점, 신세계백화점과 함께 3대 명품 백화점으로 이름을 날렸던 미도파 백화점은 면직업을 바탕으로 재계 30위 권에 이름을 올린 대농그룹의 소유였다. 당초 삼성그룹, 현대그룹과 함께 대표적인 재계 1세대로 승승장구했던 대농그룹은 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대농그룹은 1946년 일제강점기 말에 사설우체국을 운영하다가 광복 후 대한 기계 작업소를 설립한 박용학 창업주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후 1949년 오양실업, 1953년 대양비료, 1955년 농산물을 취급하는 대한농산을 설립한 박용학 창업주는 물자가 부족하던 시기를 잘 타고 고속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농산의 경우 설립 당시 신동아그룹 최성모, 원풍 산업 이상순, 천일 곡산 최호, 천부 광업 어윤일이 동업자로 함께해 각 기업의 창업주가 동업 하는 이례적인 모습으로 ‘5인 그룹’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어 정부가 비료 수입을 불허하고 구상무역(두 나라 사이에 협정을 맺어, 일정 기간 수출을 균등하게 하여 무역 차액을 0으로 만들고, 결제 자금이 필요 없게 하는 무역)으로의 수입만을 허가하자 박용학은 많은 비료를 수입하는 방안과 현미, 백미, 오징어 등의 수출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식을 위해 박용학 회장은 부산냉동 주식회사 지분 50%를 인수하고, 1962년 방계회사인 삼양수산의 수산물 냉동 시설 확장과 정부의 허가를 받고 참치잡이를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용학 회장의 판단은 성공적이었다. 이에 사세를 확장한 대한 농산은 1967년 고려원양과 대한조선 주식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수출입에 발을 들였다.
이 당시 쌓은 자본을 바탕으로 박용학 회장은 1968년 대농그룹의 기초가 되는 금성 방직과 태평 방직을 인수한다. 이와 더불어 무역협회에서 운영하던 미도파백화점이 매물로 나와 1년 후에, 대한농산에서 인수해 큰 이익을 얻었다.
이는 미도파백화점이 3대 명품 백화점으로 불리며 대농그룹의 주 수입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박용학 회장은 1973년 태평 방직, 대한농산, 한일조직 등을 통합한 대농을 출범시키고 같은 해 세방기업의 이의순과 합작, 셋방 해운을 설립해 해운업에도 진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5인 그룹의 최성모가 소유한 신동화 화재 지분 38%를 인수해 보험업에도 진출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다만, 1975년 국제 원면 파동과 1차 오일쇼크로 인해 주거래 은행인 신탁은행 등 5개 은행의 관리를 피할 수 없었던 대농그룹은 금성방직 등 4개 회사를 내놓고 뉴관악골프장, 해운대 호텔 부지 등을 매각해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이어 1977년 박용학 창업주의 장남 박용일 부사장이 대농의 사장으로 진급하며 2세 경영에 돌입하며 대농그룹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는 박용일 사장이 대농의 위기가 편중된 사업 탓이라 생각해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돌입한 것이다. 1978년 대성 건설진흥을 인수하고 유통, 금융, 정보통신 등 여러 사업에 손대기 시작한 박용일 회장은 1996년 말 22개의 계열사에 달할 정도로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계열사 인수·설립에는 대농과 미도파백화점이 지급보증을 섰던 것이 향후 대농그룹의 몰락을 이끄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즉, 계열사들 모두 성장하지 못하면서 부실이 누적됐으며, 급격한 임금 상승과 더불어 면직 업체 경기가 극도로 침체하는 상황도 겹쳐 악재로 적용한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1996년 대농그룹은 2,932억 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신동방그룹이 미도파백화점을 갖기 위해 지분 매입 절차에 돌입했다. 이에 경영권 방어를 위해 1,200억 원을 쏟아부은 대농그룹은 경영권은 지켰지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부채 규모가 늘어나게 됐다.
결국 1996년 말 대농그룹의 총자산 1조 8,000억 원과 비슷한 부채 규모로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회수하면서 부도유예협약 대상 업체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농그룹은 1997년 계열사 10곳을 정리하고 청주 방적공장 용지 매각 등을 추진하며 회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파멸을 면치 못했다.
당시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 강세를 보이며 미도파백화점이 위축되는 악재까지 겹치며 대농그룹 대부분의 계열사는 매각되고, 미도파백화점은 지난 2002년 롯데쇼핑에 9,682억 원에 인수되면서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대농그룹이 미도파를 포기했다면 그룹 전체가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박용학 창업주는 생전 고향 친구인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와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박용학 회장과 정주영 회장은 전국 경영인연합회 공식 행사에서도 함께 농담하고 다니며 분위기를 살렸으며, 숙소도 옆방을 잡아 함께 술을 마시는 등 사이가 돈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어 박용학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던 당시 타고난 사교성과 유머 감각으로 ‘재계의 마당발’로 꼽히며 한일경제협회 회장, 한중경제 협력위원회 위원장, 무역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간 차원의 대외통상 및 무역 교류 확대에 힘써왔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다만, 지난 2014년 ‘한국 면방직 업계의 선구자’, ‘한국 수출산업의 견인차’로 불리던 박용학 대농그룹 명예회장은 절친했던 정주영 회장을 뒤따라 향년 99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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