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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리쿠] 카나자와, 100만 석의 역사 속으로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디시인사이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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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에서 내려다 본 이시카와 현의 서안.
저 뒷편에 울퉁불퉁한 해안선 보이는데 올해 신정 때 지진났던 노토 반도임. 묵념
운이 좋았다. 올해의 마지막 여행은 아마도 이 호쿠리쿠로 끝남
역사 위주 글이지만 직접 답사해서 썼으니 관심있는 갤럼은 읽어보삼
너무 길면 중간중간 스킵하고, 반말로 되어 있으니 양해 부탁
언젠가 쓰고 싶었던 글이고, 쓰고 나니 후련해졌다
근데 정작 본인도 읽기 귀찮아지는 지리멸렬함..
호쿠리쿠 지방이나 일본사 좋아하면 술술 읽힐지도?
아무튼 카나자와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이 뻘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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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카와 현립 역사박물관에서 관람하던 중 특이한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마에다 가문을 상징하는 가몬 우메바치(梅鉢)
즉, ‘카가 매화 바리때(=공양 밥그릇)’ 모양.
도쿠가와가 주름잡던 에도 막부 아래서 유일하게 100만 석 이상의 석고를 자랑한 명문,
거대 다이묘 ‘마에다’는 카가 지역의 중심도시 ‘카나자와’를 부흥시켜 그 상징이 되었다.
마에다 없이 카나자와라는 도시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면,
세키가하라 없이 에도시대 카가 번의 성립을 논할 수 없다.
도요토미를 중심으로 통일된 전국은 그의 죽음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승기를 잡은 도쿠가와는 막부를 수립함으로써 전국 질서를 재편했다.
에도 막부 아래서 각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 중에서도 마에다 가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본 글에서는 에도시대 순위권의 도시로서 기나긴 영화를 누린 카나자와,
그리고 마에다가 통치했던 카가 번의 성립 과정을 간략히 살피고자 함.
여기에는 초대번주 토시나가의 예상치 못 한 빤쓰런이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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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보의 번화가를 거닐다 보면 특이하게 생긴 건물이 있다.
카가 번의 번조, 마에다 토시이에와 부인 오마츠를 기리는 오야마 신사.
번조를 모시는 신사의 건립은 막부 말기~메이지 초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오야마 신사 역시 그 일환로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토시이에의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는 중.
눈길을 끄는 녹색 건물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건립된 신문이라고 한다.
츠다 키치노스케의 설계 및 시공으로 완성된 문이라는데,
지붕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피뢰침이 달려있다.
꼭대기 층에 장식된 색유리는 카나자와의 항구에서도 보였기에 과거 등대 역할도 겸했으나,
오늘날에는 빌딩이 들어서고 공기의 투명도가 떨어지면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함.
또한 이렇게 화려한 건물이 세워진 이유는 참배객 수가 감소해 다시 끌어오기 위해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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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통과하면 마에다 토시이에의 기마상과 황금 투구, 그리고 오마츠의 비석이 있다.
특이하게도 토시이에와 오마츠는 연애혼으로 맺어진 한 쌍.
물론 전국시대에 흔했던 것은 자유가 배제된 정략 결혼이었다. 
금슬 좋았던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드라마도 제작되어 2002년 방영되었는데,
제목은 [토시이에와 마츠 ~카가 백만석 이야기~]
한편 창을 든 동상에서 엿보이듯 토시이에는 당대에 이름난 창술의 명인.
신장은 무려 180cm인데다 6m 길이의 창을 꼬나들고 다녔다고 한다.
오와리노쿠니 카이토군 ( 나고야 ) 호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해당 지역을 주름잡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관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1581년 노토 1국(23만 석)을 하사받는데 이것이 카가 번 역사의 시작이다.
덤으로 토시이에는 3대 정원의 하나인 겐로쿠엔을 조성하기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함.
훗날의 카가 번 초대번주는 장남 토시나가, 번조에 해당하는 인물은 아버지 토시이에.
이거 헷갈리기 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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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듬해 혼노지의 변이 발생,
일본 통일을 앞두고 주군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 아케치의 배신으로 사망했다.
또다른 가신 히데요시는 아케치 토벌 후 스스로 천하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다.
(훗날의 도요토미, 당시의 성은 하시바)
여기에 오다 가문의 중신 시바타 카츠이에 등은 정면으로 반발했고…
1583년 봄, 시바타 일파의 거점인 키타노쇼(오늘날 후쿠이)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홋코쿠 가도를 따라 남하한 시바타의 군세는 비와호 북쪽에서 히데요시 군과 격돌하는데,
이것이 영혼의 한타 ‘시즈가타케 전투’
마에다 토시이에 역시 거점인 노토에서 시바타 세력을 따라 참전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토시이에는 소규모 교전 끝에 전장을 이탈했으며,
패전 후 원래 친분이 있던 히데요시에게 가담해 키타노쇼를 공략한다.
당시의 공으로 북부 카가 2군이 더해져 노토 국을 떠나 카나자와로 입성.
1585년 삿사 나리마사를 토벌한 덕에 엣추(토야마 현) 3군이 더해져, 장남 토시나가에게 수여되었다.
훗날 카가 번의 초대번주가 될 토시나가는 이때부터 독립적인 다이묘로 인정된 것.
위 사진은 마에다 토시나가의 초상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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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시바타의 조카인 사쿠마 모리마사가 보유했던 영토, 카나자와.
사쿠마의 축성으로 말미암아 카나자와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586년부터 마에다 토시이에는 이 카나자와성과 죠카마치의 정비에 착수한다.
이때 성의 천수도 건립되는데 1602년 낙뢰로 소실, 이후 단 한 번도 재건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성 주변에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은 걸 보면 현명한 판단..
또한 당시 성의 대대적인 정비에는 타카야마 우콘의 활약이 있었다.
일본 천주교에서 위대한 성인으로 손꼽히는 그는 축성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는데,
1588년부터 마에다의 산하로 들어가 건축 외 다방면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현재 터번카레 메인스토어 인근에 카톨릭 카나자와 교회( ‘나고야’ 교구 소속)가 있으며,
그곳에 타카야마 우콘의 동상과 성유물이 남아있다.
토시이에는 훗날 유서에 ‘타카야마 우콘과 쵸 츠라타츠, 두 사람은 쓸 만하다’고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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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이후 조선 침략, 히데츠구 사건 등의 병크를 거듭하며 민심을 잃다가 1598년 눈을 감는다.
죽기 직전까지 마에다, 도쿠가와 등 오대로를 비롯한 주변인에게 아들의 안위를 당부했다.
전국시대 3걸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도요토미가 주군 오다의 가문을 삼켰듯, 이제는 도쿠가와가 도요토미를 삼킬 차례였다.
도요토미 정권하 최대 실력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금지했던 다이묘 간의 정략결혼 및 토지 분배를 줄줄이 성사시켰고,
도쿠가와의 인척 가문과 무단파 장수들은 후시미 성의 이에야스 밑에 모여들었다.
여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오사카의 실력자는 오로지 마에다 토시이에였다.
도요토미 생전의 맹우이자 정권 내 원로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
석고로 치면 마에다: 카나자와 83만 석 / 도쿠가와: 에도 255만 석 정도지만 실제 무게감은 엇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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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토시이에의 유명한 황금 투구)
하지만 1599년이 되어 설상가상으로 마에다 토시이에마저 병으로 사망,
힘의 균형추는 단박에 친도쿠가와 세력으로 기울어버린다.
엣추(오늘날 토야마)를 다스리던 장남 마에다 토시나가는 카나자와로 입성해 뒤를 이었다.
토시이에의 유언에 따라 카가 2군은 토시나가에게, 노토 1국은 차남 토시마사의 소유가 되었다.
참고로 두 사람 모두 아버지와 같은 지역( 나고야 ) 출신.
이제 도쿠가와는 오대로 가문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한 술 더 떠서,
카나자와로 귀국한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모반 혐의를 씌우고 카가 정벌을 암시했다.
당연히 마에다 형제는 격분했지만, 중신까지 파견해 싹싹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도쿠가와의 천하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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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신사 내부에 있는 오마츠의 비석)
토시이에가 사망하면서 호슌인을 칭하게 된 부인, 오마츠.
사건 당시 미망인으로 출가해 있던 이 ‘호슌인’은 구국의 결단을 내린다.
도쿠가와의 본거지인 에도성으로 인질이 되어 들어가기를 자청했던 것.
원래대로면 마에다 형제는 주전파로서 반도쿠가와의 선봉이 되었을 운명이고,
실제로 토시나가는 타카야마 우콘에게 명해 카나자와성 해자의 굴착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생모를 인질로 바친 마에다는 이제 이에야스를 거역 못 하는 신세.
아이러니하게도, 이 굴욕적인 사건이 머지않아 마에다 가문을 구하게 된다.
도쿠가와는 다음 타깃으로 아이즈와카마츠의 우에스기 가문을 지목,
최근의 영토 이전으로 필요해진 대규모 토목사업을 빌미로 반역을 획책한다며 추궁했다.
오대로 우에스기는 마에다와 달리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에야스는 상락을 거부한 우에스기를 토벌한다며 다이묘들을 소집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원인이 된 아이즈 정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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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야마 현 타카오카 성터에 세워진 마에다 토시나가의 기마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5방면에서 아이즈 침공을 계획한다.
마에다 토시나가에게도 역시 츠가와구치(오늘날 니가타 현)를 통해 진군하도록 명령.
여기서 이변이 발생하는데, (아이즈-오사카 간의 실제 사전모의 여부는 불투명)
도쿠가와가 다이묘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오사카에서 반도쿠가와 세력이 결집했다.
모리 테루모토를 총대장으로 하는 이들을 서군이라 하며, 도쿠가와를 따른 세력은 동군이라 부른다.
서군의 거병 소식을 접한 도쿠가와의 동군은 아이즈를 공략하는 대신 서쪽으로 신속히 진격했다.
일본은 다시 한 번 분열되었다.
한편 마에다 가문의 당주 토시나가는 어머니가 에도에 인질로 잡혀있었기에,
자연히 도쿠가와의 지시를 따르는 동군으로 가담한다.
마에다군 25,000명은 전국 굴지의 대군이었고 서군에 큰 위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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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참근교대 루트. 사진의 중앙이 나카센도, 남쪽 해안선이 신칸센으로 유명한 토카이도)
흔히 세키가하라 전투라고 하면, 반나절 만에 종료된 단기 결전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전국이 두 패로 나뉘어 격전이 벌어졌다.
토호쿠에 남겨진 우에스기는 전략을 선회하여 동군의 다테, 모가미와 합세한 에도 침공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야마가타의 모가미는 화평하는 척하며 선수 칠 태세를 보였고(다테는 엉뚱한 일을 꾸미던 중..),
격노한 우에스기는 모가미령을 침공, 하세도 성 공방전(오늘날 야마가타 시내)으로 이어졌다.
= 토호쿠의 세키가하라, ‘케이쵸 데와 합전’
한편, 서쪽의 오사카에서 출진한 서군 본대는 후시미 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타나베(교토부 북부), 오츠(비와호 남부), 아노츠(갤에서 유명한 ‘쓰’ 지방 맞다) 등으로 군사를 나누었다.
이 중 타나베와 오츠에는 각각 15,000명을 파견했는데, 공략이 지연되어 결전에 불참.
서군 총대장 모리 테루모토(히로시마 성주)는 서일본 장악에 눈독을 들여 지엽적인 전선에 몰두했다.
일족 재기를 노리는 오토모 요시무네를 원조해 북큐슈에 상륙시켰지만, 이시가키하라(오늘날 벳푸 시내)에서 패전.
또한 시코쿠의 마츠야마로 통하는 미츠하마 항구에 모리의 지시로 무라카미 수군 등이 상륙하나 뜻대로 안 풀렸다.
오사카성에 틀어박혀 친정에 나서지도 않았고, 결국 서군을 패전으로 이끌었다.
세키가하라 전역의 핵심 관건은 1600년 10월 21일 본전선까지 얼마나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느냐였다.
그런 전략적 관점에서 우에다(오늘날 나가노 시 근처) 성주 사나다 마사유키는 단독 VVIP.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쪽으로 회군하면서 휘하의 군세를 두 방향으로 나누었다.
아들 히데타다에게 나카센도를 행군시켰고, 자신은 토카이도로 선발대를 보낸 뒤 본대를 이끌고 뒤따랐다.
시나노의 소영주였던 사나다는 홀로 방어전을 펼치며 38,000+명의 히데타다 부대를 농락,
동군은 당초 목표했던 시나노 평정에 실패했으며 나카센도의 험로 탓에 결전에도 불참하게 된다.
나카센도의 히데타다군을 얼떨결에 막아낸 서군 수뇌부에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호쿠리쿠도(=홋코쿠 가도)에서 마에다군 25,000명이 남하를 개시한 것.
그렇게 [호쿠리쿠의 세키가하라]는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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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16일 개업한 호쿠리쿠 신칸센 카나자와-츠루가 구간 = 붉은 선)
서군에는 사나다 마사유키 외에 또 한사람, 천군만마의 장수가 있었다.
바로 츠루가(후쿠이 현의 츠루가) 성주였던 오타니 요시츠구.
근대화 이후 무역에 용이한 태평양 연안 도시들이 발달하면서 호쿠리쿠 지방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츠루가는 무역과 물류의 요충지였던 만큼 행정에 수완을 발휘해 출세한 오타니에게 맡겨졌다.
후시미성을 함락시킨 서군이 각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출병할 때,
이 남자는 호쿠리쿠 방면 총대장으로서 6,000명을 이끌고 거성인 츠루가로 복귀했다.
마에다 가문을 제외한 호쿠리쿠 다이묘들은 대개 5만 석 이하의 작은 세력이었다.
오타니는 이들 중 호리오 씨를 제외한 13명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지만,
츠루가 도착이 지연되어 서군 영주들은 각자도생의 위기에 놓였다.
카나자와성을 출발한 마에다 토시나가의 군대를 최초로 맞이한 세력은 니와 나가시게.
코마츠(=고마쓰 공항 소재지) 성주이자 오다 사천왕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나가시게는 고작 12만 5천 석의 다이묘인데다 병력은 약 3천.
병력부터 8배 차이 나는 압도적인 열세였고..
시간이 아깝던 토시나가도 개성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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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주가 대영주한테 대항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나가시게의 대답은 놀랍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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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T 까아 ~
조 카 .
이 남다른 배짱의 해답은 코마츠성의 방어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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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츠 시 로죠공원 내부의 시립박물관에 전시되었던 코마츠성 모형.
동 박물관은 올해 노토반도 지진 직후부터 휴관, 이후 건물 붕괴의 가능성이 있어 철거 예정임.
직접 일대를 답사했는데 거의 볼거리가 안 남아서 유감..
지금은 흔적이 거의 안 남았지만, 코마츠성은 호쿠리쿠에서 둘도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물 위에 뜬 성’이라는 별칭이 암시하듯, 수면을 전부 매립하지 않는 이상 진입로 확보부터 난감.
그 견고함 앞에 토시나가도 금방 포위를 해제하고 인근에 견제 병력만 남기게 된다.
그 대신 코마츠에서 조금 남하한 마에다군은 다이쇼지성을 함락시켰다.
다이쇼지 낙성으로 인한 공포가 호쿠리쿠에 전염되어서는 곤란했다.
때마침 츠루가에 입성한 오타니가 본격적인 행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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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챠야에 있는 카페, 하쿠지의 라떼 아트.
일그러지는 카나자와의 츠즈미몬
호쿠리쿠 방면에 대한 오타니의 두 번째 공작은 바로 정보전이었다.
그는 서군의 유리함을 과장하고 허위 사실을 섞어 호쿠리쿠 전역에 선전하기 시작했다.
츠루가의 서군이 총 4만 명이며, 이 군대는 육로와 해로로 나누어 카나자와성을 친다는 것.
물론 초대형 뻥카였다. 고작 6천 명으로…
특히 토시나가의 매제를 붙잡아 위서를 전달하도록 협박한 것이 먹혔던 모양.
위서를 접수한 토시나가는 오히려 자신이 수세에 몰리게 된 것마냥 동요했다.
마침 동쪽의 에치고(오늘날 니가타 현)에서 호리 씨가 서군인 척해서 더 불안했을지도?
경위야 어쨌건 마에다군은 거점인 카나자와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마츠에서 관망 중이던 니와 나가시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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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츠 시의 지도.
지도 서북쪽에 고마쓰 공항이 위치하고,
그 위에 바다로부터 두 갈래로 나뉘는 강이 흐르는데 이름하여 카케하시가와.
난공불락의 코마츠성은 이 강을 배후에 끼고 축조되었다.
카케하시가와에서 남쪽으로 갈라지는 물줄기인 마에가와를 따라가면 키바 호수와 만나고,
그 북쪽 호반에는 ‘아사이나와테’라는 장소가 있다.
‘나와테’란, 마치 새끼줄처럼 가느다란 줄기와 같은 형태로 뻗은 길을 의미한다.
코마츠성 주위에는 진창 내지 질척한 논바닥이 널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몇 줄기의 길(=나와테)이 나있었다.
니와 나가시게는 이 까다로운 장소를 필승의 전장으로 골랐다.
각 도로의 폭이 협소한 만큼이나 대군의 기동이 어려웠기 때문.
좁다란 길을 통과하도록 예정된 대군의 철수 행렬…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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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쵸 5년 8월 9일
아사이나와테에서 양군은 격돌한다.
니와 가문의 에구치 마사요시 예하 부대는 사전에 매복하고 있었고,
철수 도중인 마에다군을 발견하자 후미를 급습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매복 기습은 적중했다.
이후 비좁은 전장에 니와, 마에다 각각의 후속 부대가 도착하면서 난전에 난전을 거듭.
가장 어렵다는 철퇴전에서, 당일 후미를 맡은 인물은 마에다 가문의 중신 쵸 츠라타츠였다.
평생 41차례의 회전을 경험한 역전의 무장은 분투 끝에 니와군을 격퇴해냈다.
하지만 피해가 컸고 지형의 불리함을 감안했는지 코마츠성까지 추격은 포기.
결과는 니와군의 명백한 전술적 승리였다.
만약 서군이 한 달 뒤의 결전에서 이겼다면 제대로 포상 받았을 감투
그 날 마에다 가문에서는 이름난 9명의 무장이 전사했는데,
지금도 아사이나와테 고전장에 가면 각 장수가 절명한 지점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가 꺾인 마에다의 대군은 그 길로 카나자와까지 귀성했다.
이 전투를 두고 ‘호쿠리쿠의 세키가하라’, 아사이나와테 전투라고 부른다.
사진은 코마츠성 천수각 터에 올라 바라본 아사이나와테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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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으로, 이후 성립되는 카가 번에는 독자적인 신분 체계가 존재했다.
마에다 가신단의 정점에는 토시요리슈 핫카, 통칭 ‘카가 핫카’를 두었는데,
번주의 바로 밑에서 정치와 군사를 보좌한 여덟 가문을 말한다.
앞선 싸움에서도 분전한 츠라타츠의 쵸 가문은 33,000석을 보유하며 그 일원이 되었다.
카가 핫카의 일원들은 역직으로서 카나자와 및 코마츠의 성주 대.리까지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모두 1만 석 이상을 보유하여 실질적인 대우는 다이묘 수준.
역시 벼슬을 해도 대감집에서 해야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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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카나자와로 복귀한 마에다 토시나가는 성의 방비를 서두르는 한편,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며 다시 한 번 정세를 살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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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는 속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오타니 홈런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노(오늘날 기후 현) 출두 명령이 떨어지자 2차 침공을 개시한 토시나가.
코마츠와 키타노쇼(후쿠이)로 사절을 보내 개성을 권유했고, 다행히 이번에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츠루가에 있던 오타니의 본대는 온데간데 없었다.
토시나가가 출병하기도 전에 군대를 이끌고 결전장으로 향한지 오래였던 탓.
나카센도의 히데타다와 마찬가지로, 호쿠리쿠도의 토시나가는 결전에 늦었다.
서군은 두 방면에서 전략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토카이도를 따라 신속히 서진해온 동군의 선발대는 기후 성, 이누야마 성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동군의 유일한 구심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대가 오기까지 충실하게 기다렸다.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 등 서군의 주력부대도 세키가하라에 속속 집결.
모리 테루모토의 대.리인 히데모토는 아노츠성 공략 이후 미노로 직행, 난구야마에 진을 쳤다.
오사카성에 머물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출병해 마츠오야마에 포진했으나 내통 혐의를 받고 있었다.
오타니의 휘하 장수 중 절반은 코바야카와를 감시하는 위치에, 나머지 절반은 평지에서 동군과 교전했다.
손도 안 대고 25,000 마에다군을 막았던 이 지장은 결국 코바야카와 및 감시부대에 배신당해 패전, 할복.
서군 수뇌부는 이 세키가하라 전투를 군사적인 대결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반절은 도쿠가와의 공작이 끝나있던 정치 싸움에 불과했다.
서군의 내부 배신으로 ‘결전’은 반나절 만에 종료…
패전보를 접한 전국 각지의 서군은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외는 다테, 모가미 당주들을 위기까지 몰아넣은 대영주 우에스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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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군의 승전보를 접한 마에다 토시나가는 드디어 자신의 투구를 벗을 수 있었다. 
(사진은 토야마 시 향토박물관에 소장된 토시나가의 투구, 긴나마즈오나리카부토. 길이 127.5cm, 무게 4kg)
이윽고 돌아온 논공행상의 시간.
토시나가는 코마츠를 개성시키고 다이쇼지를 점령한 공 덕분에 남부 카가 2군을 배령,
아울러 참전을 거부한 동생 토시마사의 노토 국은 몰수되어 토시나가의 영지가 되었다.
카가, 노토(합쳐서 이시카와 현), 엣추(토야마 현) 3국을 다스릴 카가 초대번주 탄생의 순간.
같은 오대로였던 모리, 우에스기가 약 30만 석의 가문으로 전락한 것과 대조적이다.
훗날 마에다 가문은 에도 막부 3대 쇼군 이에미츠로부터 119만 2,760석이 공인되었다.
토야마 번 10만 석, 카가 다이쇼지 번 7만 석을 분할한 뒤 최종적으로는 102만 5천 석.
통칭, [카가 100만 석].
이 이름을 딴 거리도 맥주도 축제도 다 존재한다…
센다이 번의 다테 가문이 개간사업의 성공으로 실질 석고 200만을 달성했지만,
명목 상의 석고 및 막부 내에서의 지위는 마에다가 으뜸이었다고.

도쿠가와의 인척으로 온갖 특혜를 누렸으며 카나자와는 무려 400년간 전란을 피해감 ㅎㄷㄷ
메이지 이전까지 무려 나고야와 전국 4, 5위를 다투는 대도시였다.
얼마나 부유했는지 참근교대 당시 마에다는 신하 2,000명을 거느리고,
카나자와~에도 편도 비용에 현재가치로 약 7억 엔을 소비했다고도 함.
그 번영이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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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도쿠가와 막부 아래서의 지나친 특권은 나중에 독이 되기도 했다.
메이지 신정부군과 막부군이 싸울 때도 기울어가는 막부 편으로 남은 것.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비로소 전향하기 시작했다고 함.
메이지 신정부에 판적봉환을 실시하기까지 마에다는 카나자와에 머물며 번영을 누림.
심지어 메이지 시대에도 후작 가문이 되어 화족으로 군림.
한 마디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심지어 지금도 잘 살고 있다..
– 끗 –

출처: 일본여행 – 관동이외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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