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에서 내가 겪었던 재난 상황(장문)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반갑습니다. 이전에 ‘전시에 내 재산을 지키는 방법(장문)’ 글 쓴 사람입니다. 제가 겪은 재난 썰(장문)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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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벌써 2년도 넘은 이야기다
2022년 8월 8일,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그날 밤에 나는 강남 한복판에 있었다
월요일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여름방학의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대치동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
아침, 오후, 저녁까지 3개의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비 예보가 있다는 어머님 말씀에 우산을 하나 챙겼다
1호선 용산행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서 역사로 가는 길은 흐렸다. 하지만 왜 인지 여름의 꿉꿉한 공기는 아니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17시, 오후의 두 번째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
비가 꽤 많이 오고 있었다. 학원 건물 입구 바닥은 물이 흥건해 미끄러웠으며 나는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은 채로 이동해야 했다
18시 쯤 식사를 마치고 학원에 도착해 발을 말리면서 다음 수업을 기다렸다
뉴스를 보니까 다른 지역은 거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철도가 침수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건물이 침수되어서 인명피해가 났다더라
아버지는 내가 걱정되어서 수업이 끝나는 21시 30분에 대치동으로 나를 픽업하러 차를 끌고 오시기로 했다
20시, 마지막 수업이 한창이었다
밖이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어떤 사람들이 고함을 치기도 하고, 자동차 클락션 소리가 많이 들렸다. 무슨 일 났나 싶을 정도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온 교실을 울렸기 때문이다
학원 선생이 쉬는 시간에 애들 줄 음료를 사려고 편의점에 다녀왔다
분명히 우산을 쓰고 갔다 왔다는 데, 등판이 다 젖어있더라
“너네 오늘 집 못 가겠는데?” 이랬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적분 여름 캠프 가나요?” 이 지랄 농담 따먹었다
21시 30분, 수업이 끝나서 학원을 나서야 했다
나서야 했다. 그런데, 학원 입구에서 발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너무 많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거센 폭우였다
순간 나가기 싫은 느낌이 든다. 어디까지 젖을까? 가방에 있는 교재는? 필기도 열심히 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들, 거기까지 못 들어가”
“지금 앞에 사거리 다 잠겨서 난리야. 앞에 다리까지 너가 와야 해”
두 블럭을 내려가야 한다. 먼 거리는 아니다. 평소라면 10분도 안되서 걸어갈 수 있다
그렇게 사거리를 지나쳐서 대치역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왜 인지, 앞으로 갈 수록 인도에 사람이 꽉 찼다
3분도 안 걸었는데, 꽉 막혀서 더 갈 수가 없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갑자기 다시 뒤로 돌아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앞으로 이동했다. 저 사람들은 왜 다시 돌아가지? 라는 의문을 저버릴 수 없었다
대열의 제일 앞에 도달했다
내 눈앞에 있던 광경은 쉬이 믿어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몇 시간 전에 저녁을 먹기 위해 걸었던 곳이 물에 잠겨있었다
차가 2~3대 정도 물에 잠겨 둥둥 떠있더라
주위 점포에는 물이 넘실대면서 들이닥쳤다. 주인 분들은 빗자루로 필사적으로 물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다
횡단보도에는 배꼽 위까지 오는 물이 찼는데 그 안에서 경찰 아저씨가 사람들이 못 건너게 막고 있었다
이따금 잼민이들이 가방을 맨 채로 거의 헤엄치다시피 횡단보도를 기어코 건너더라
나는 가방에 소중한 책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런 건 엄두도 못 냈다
주변 건물에서 비를 피하면서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여기 위에 잠겨서 못 지나가”
“헤엄쳐서 건너. 여기 애들은 다 그렇게 오고 있어”
“여긴 경찰이 막고 있어. 난 가방에 책도 있고. 내가 알아서 거기까지 가볼게”
전화를 끊고 다시 사거리를 보니까, 경찰 아저씨 가슴팍까지 물이 차더라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때라도 헤엄쳐서 두 블록을 내려가야 했다. (실수 1)
두 블록을 내려가야 하는데, 대치역 사거리에 도착하기도 한참 전에 발이 묶이니까 너무 혼란스러웠다
도로가 막혔으니, 버스고 택시고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한티역까지 가서 수인분당선(노랑색) 타고 대치동만 어떻게든 벗어나 보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한티역이 잠겼네, 전철이 아예 못 간다네 하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제 몸 하나 겨우 비 피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팩트체크 같은 건 사치였다
결국 골목길을 도보로 돌파하기로 마음 먹었다
골목길은 언덕을 따라서 난, 고지대로 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걸을 만 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대치역 쪽 (남쪽)으로 향하는 골목은 저지대 방향이라 다 잠겨 있었다
당초 계획은 위 그림처럼 조금 직진해서 바로 남쪽으로 꺾는 것이었으나
결국 거의 한 블록 가량을 내리 이동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획이 두 세 번 정도 틀어지니까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려워지더라
시간은 10시 10분. 너무 늦었고 지쳤다. 차라리 어디에서 하룻밤 자고 가면 안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가야 했다. 한티역, 도곡역 사거리는 내가 앞서 본 사거리들처럼 잠겼을 것이므로, 이 골목길에서 꺾어서 남하하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는 비교적 배수가 잘 되어서 지나가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처음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골목은 내가 앞서 본 골목보다는 확실히 상황이 낫긴 했다
물은 겨우 무릎 높이였고 가로등 덕분에 길도 밝았다
바지를 걷은 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장 무서웠던 건, 바닥이 안 보인다는 거였다
그래도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인도와 차도 위를 거침없이 걸었다(실수 2)
예상대로, 아파트 단지 안쪽은 걷기 쉬웠다
하지만 가로등이 다 꺼져 있어서 휴대폰 보조등을 켜면서 걸어야 했다
차가 있을 수도 있고, 앞에 장애물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근데 배터리가 존나 빨리 닳았다
보조등에, 카카오맵에, 간간히 전화 통화에.. 말이 필요 없다
아파트 단지 끝에 다다랐는데
단지가 고지대라서 하천 변에 도로가 저기 아래에 있더라
또 한참 돌아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거의 다 왔다. 다리로 올라가는 길에 서서 내가 왔던 길을 보니까, 하천 바로 옆이라서 위험하기 짝이 없더라(실수 3)
나는 사람 없고 안 잠겨서 좋다고 걸었지만 하천이 범람했다면, 답도 없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로 올라가는 길도 없어서 꼼짝 없이 휩쓸렸을 거라고 생각이 드니까 소름 돋았다
다리에서 아버지랑 만나서, 이후에는 평화롭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제 양재천은 이래 작은 하천인데, 그 때는 하천 주변에 인도랑 자전거도로가 잠길 정도로 물이 불었었다고 한다
비가 조금만 더 왔거나 했으면 정말 위험했겠지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까, 맨홀 구멍에 빠져서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도 나오더라
그제서야 내가 오늘 하루 얼마나 위험하게 싸돌아다녔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흙탕물에 숨겨진 맨홀에 빠질 수 있었고
쓰러진 전신주에 의해 감전될 수 있었고
불어난 하천에 휩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학원 교재 때문에 이런 리스크를 감수했다
처음부터 학원 교재를 버릴 생각으로 횡단보도를 헤엄치지 않은 게 실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점은 내가 너무 무기력했다는 사실이다
비를 피하던 건물 아래에서 나는 몇 번이고 그냥 집에 가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말이지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움츠러들더라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는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나는 죽을 뻔했다
누구는 상상이라도 했을까? 2022년에, 강남 한복판에서, 폭우로 이런 위험을 겪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재난이 재난인 것이다
내가 배운 것은..
0.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라(목숨과 학원 교재 중에서)
1. 실제 상황에서 계획은 망가진다
2. 나는 무력하다
3. 유언비어는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극도로 위험하다
4. 침착하자
아래는 그 날 찍은 사진
끝으로, 해당 폭우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 생존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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