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미치노에키 노숙은 해가 뜨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는 마무리하고 자리를 떠야 한다
직원들이 없는 시간에 ‘묵인해 주는 것’이지 일단은 직원과 마주치면 제지를 당하기 때문임
어제는 산길을 타고 사세보로 와서 사세보가 군항 도시라는 게 실감이 안 갔지만, 해안가에 가까워져 갈수록 해군, 해자대와 관련된 무언가가 뭉탱이로 나오기 시작함
그나저나 신경을 안 써서 몰랐는데 이 친구, 다시 보니까 ‘해자대’ 소속이 아니었네…
식당에서도 유명한 해군 카레 정식과 미국식 햄부기를 판다고 들어서 그걸 먹어보려 했는데 아침에는 아침 정식밖에 안 한대서 그냥 아침 정식으로 시켰다
해군 카레랑 햄부기는 다른 군항도시에서도 먹을 기회가 있겠지 뭐
완식하고 출발했다
사세보 뿐 아니라 구레, 마이즈루, 요코스카, 오미나토같이 해자대 지방대 기지가 있는 도시는 전부 다 칸코레랑 콜라보를 했었기에 여기저기에 이렇게 스탠드가 세워져 있다
내가 칸코레를 잘 아는 건 아닌데 참고로 얘는 전쟁 말기에 항모로 개장당한 여객선 타이요(전 카스가마루)임ㅇㅇ
그나저나 칸코레 근황이 어떨런지 모르겠네
사세보역 근처 몇 블럭 정도가 전부 조선소, 건선거, 군항이라 어딜 찍어도 앵카가 보이고 군함이 보인다
한국에서 군생활을 한 내 입장에서는 군 기지랑 관광 명소가 이렇게 가까운 것도, 군항에서 낚시하는 것도 신선한 풍경이었어
얘넨 일단 명목상 ‘군대’가 아니라 그런가 딱히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음
코자키하나 공원 방문 인증서를 받으려고 사세보역 관광정보센터에 들렀음
뭐, 받아서 뿌듯하긴 한데 이거 두 달동안 안 구겨지게 들고 다니는 건 힘들겠지?
관광정보센터에서 뭔가 기념품이라도 사 볼까 했는데 이런 것밖에 없어서 접었다
한국에서 못 입고 다닐 거 아냐 시발
경량화실이 꽤나 깨끗하길래 급히 경량화를 해 주고 바로 출발했다
이렇게나 짧은 횡단보도인데도 초록불이 엄청 길고 또 자주 들어왔음
난 지나갈 생각이 없었고, 이번 신호에 안 지나간다고 운전자들한테 신호도 보냈거든? 근데 차들이 그냥 지나갈 생각을 안 하더라
좀 배부른 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좀 과친절같음
여긴 자전거가 지나가는 길이 맞긴 하냐?
분명 옆에 자전거 통행가능 표지판이 붙어있긴 했는데 길이 왜 이래
아침에 나올 때 까지만 해도 분명 비 소식이 없었는데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달리려던 차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하늘 좀 흐리면 무조건 비가 오겠구나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음
그래서 비 그칠 때까지 1시간 정도 쉬었다
왜냐? 침낭이 젖으면 안 되거든
내가 젖으면 숙소 하루 잡아서 씻고 푹 자면 끝이지만 침낭이 젖으면 침낭이 마를때까지 쭉 숙소를 잡아야 하잖아? 그런 식으로 돈을 펑펑 쓰고 싶지는 않았음
근데 쉬지 말고 가던가, 아예 푸욱 3시간 정도 쉬었어야 했는데…
여기서부터 잘못된 판단이 쌓이고 쌓여 개 좆같은 상황이라는 거대한 스노우볼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앞에서 깔아둔 복선이랑은 별개로 오늘 목적지인 미야마까지 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거리 85km에 획득고도도 180m 뿐이라 밟으면 그냥 슝슝 나가는 수준이었던데다가, 내가 밟게 될 국도가 막 보수공사를 끝낸 곳이었는지 전체적으로 노면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임
여기서 산만 아니면 일본은 개좆밥일지도 모르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두 번째 잘못된 판단이다
무슨 차단기도, 지나갈 수 있게 나무로 단차 메꿔 놓은 곳도 없는 철로를 지나가라길래 찍어 봄
건너고 나니까 마침 열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길래 지나갈 때까지 죽치고 앉아서 영상도 좀 남겨 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바로 앞에 타츠야(책, DVD, 게임 전문점), 대형마트, 다이소가 있어서 들어가서 구경이나 좀 해 봤음
특히 내가 서점 들어가면 나는 책 냄새를 좋아해서 타츠야에서 시간을 좀 오래 보냈어
당연히 AV 코너도 봤다
쉬메일같은 마이너한 취향 AV도 매대 하나를 채울만큼 진열되어 있던게 충격이었음
이런 것도 귀국할 때 몇 개 사가 볼까 싶었는데 집 컴에 CD롬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구매욕이 팍 죽었음
그리고 사갔는데 표지 사기면 어떡해…
아이쇼핑을 꽤나 오래 했는데도 해가 지지 않은 모습이다
여기서 정신병이 도졌다
‘지금 달린대로만 달릴 수 있다 치면, 그냥 밤새 달려서 쿠마모토 도착해 가지고 쿠마모토에서 하루종~~~일 쉬면 개꿀 아님??’
그래서 오늘의 계획이 85km에서 160km로 갑자기 늘어버렸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중간에 못 물리게 쿠마모토에 숙소도 잡아놓고 출발함
켁켁 시발 수압 보임???
무박 야간 라이딩 시작 전에 물이나 보급하고 가자는 생각으로 근처 지하철역 들렀는데 얼굴 대고 있다가 목울대랑 콧구멍 바로 강간당해 버림
시발 여기가 어디야
논두렁 길로 들어가니 좀 해메게 되더라
일본에는 길고양이 괴롭히는 사람이 없나?
내가 와서 근 일주일동안 만난 길고양이들이 전부 사람을 전혀 안 무서워하더라
얘도 내 옆에 어슬렁어슬렁거리더니 아예 내 다리 위에 앉아서 코까지 골면서 잤음
아쉽지만 조금만 자게 두고 떼어내고 다시 출발했다
아직 반도 못 왔는데 전조등 배터리가 나갈랑말랑 하기 시작했고, 비도 다시 오고 있다 시발
사실 야라를 10시간씩 하는 경우를 상정하고 전조등을 제작하지는 않을테니까 배터리가 없는게 당연하다
아무튼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이 대부분 이런 좁은 시골 굽이길이고 논두렁 길인 상황, 심지어 비도 오는데 불까지 없으면 사고 날 것 같아서 어디 충전이 가능할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코인 빨래방에 들어가봤다
근데 아니나다를까 콘센트 구멍 위에 전기 훔쳐쓰면 무슨무슨법 위반이라고 크게 써붙여 놨길래 전조등 충전은 못했음
그나저나 비 맞으면서 오니까 오들오들 떨리길래 오늘 노숙한다고 아까 샀던 핫팩들이나 붙이고 출발함
발바닥, 정수리, 뒷목, 겨드랑이, 허리 이렇게 붙였는데 효과 확실하더라
앞뒤로 차 올 때만 전조등 켜는 마이크로 컨트롤을 해 가면서 최~~~~~대한 저속주행을 한 끝에 빛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오무타라는 도시인데, 보통 행정구역이 바뀌면 교외->주거지->도심 이런 순서로 풍경이 바뀌는 게 일반적이잖아?
근데 여긴 초입부터 그냥 이 정도 수준의 유흥가가 있었음
그나저나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죄다 피어싱에 염색은 기본이요, 파파카츠 느낌 와방 나는 아저씨+젊은여자 조합도 꽤나 보여서 사진 찍으면서 돌아다니기가 무서웠다
막 경찰차도 돌아다니고…
근데 이 사람들이 진짜 그런 무서운 사람들이 맞긴 한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연말 회식을 끝낸 직장인들, 연말이라 외식을 하러 나온 아빠와 딸이었던 거고, 그냥 내가 몸과 마음이 너무나도 지치고 위축되어 있어서 세상을 비뚤어지게 보고 있는 거 아님???
내가 즐겁자고, 또 일본을 즐기자고 온 여행인데 힘드니까 생각하는 꼬라지부터 글러먹어져 버리고 일본을 못 즐기고 있잖아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객기 부리지 말고 좀 진득하게 쉬고 다시 출발하자고 결심했음
그래도 쿠마모토’현’ 안에는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 아주 살짝 더 가면 있는 쿠마모토현 아라오시의, 아라오역 대합실에서 좀 쉬었음
아니, 좀 쉬려고 했는데 그냥 아침까지 잠들어버렸음ㅋㅋ
이렇게 4일차까지 해서 무난무난한 해안길, 산길, 야간라이딩 전부 달려봤음
일종의 배치고사를 봤다고도 할 수 있지ㅇㅇ
배치고사 결과는 무난한 평지면 8~90km, 산이 끼어 있거나 뭔가 관광 비슷한 걸 하고 싶으면 60km에, 진짜진짜 무리해서 탄다 해도 100km를 넘기는 건 자제해야 한다였음
그 이상 무리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못 다닐 것 같음
앞으로 종주 진행하면서 실력이 성장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일단은 위에 말한 정도만 타는 걸로 생각하고 달리려고 함
기상
편의점에서 아침밥 먹었더니 힘이 났는지, 몸도 가볍고 페달도 엄청 쉽게 밟아져서 파악파악 달림
가는 길이 내리막에 순풍이라 기분도 좋더라
근데 아무리 밥 먹고 힘이 났다기로서니 이 정도로 체감이 클리가 있나?
어 편의점에 가방 놓고 왔어~ 시발ㅋㅋ
올 때 순풍에 내리막이었단 것은 가방 찾으러 갈 때는 역풍에 오르막이란 얘기
갑자기 내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길래 그냥 전철 타고 가기로 함
날 겁쟁이라 불러도 좋아…
가방은 찾았고, 역에 세워 둔 자전거랑 노숙 세트도 다행히 무사했음
전철이 1시간 간격으로 있어서 근 3시간을 허공에 날려버린 셈이지만 오늘은 단 40km만 달리고 구마모토에서 푹 쉴 생각이었기에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아ㅋㅋ 호텔 대욕탕에 몸 담그면 그게 극락이겠노ㅋㅋ 가보자 가보자~ 하던 참에…
사 건 발 생 ! ! !
어제 불 없이 달려오던 중에 뭘 잘못 밟기라도 했는지 안쪽 튜브랑 바깥 타이어가 전부 터져 있었다
예비튜브를 챙겨오긴 했는데 타이어까지 터지는 건 예상하지 못 한 상황, 일단 튜브를 갈고 임시방편 삼아 타이어 안에 펑크패치를 붙이고 출발함
튜브도 갈았는데 바람이 계속 빠진다
타이어 찢어진 틈으로 뭔가에 찔려서 간 튜브도 터진 걸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전거 수리점을 가야 하는데 신년 연휴라 자전거 수리점도 다 영업을 안 하고, 그나마 열려 있는 곳도 구마모토에 있는 상황…
바람 빠질 때마다 펌프로 넣어줘 가면서 구마모토까지 가야 하나? 아니지, 그러다가 림 휘면? 그럼 진짜 좆 되는건데? 호텔은 결국 돈만 날리고 못 가나?
어제 병신같이 객기 부리면서 불도 없이 달린 것에 대한 후회, 세상이 날 억까하는 것 같은 억하심정, 추위와 배고픔 등등…
부정적인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 오니까 진짜 억장 개무너져서 길가에 앉아가지고 시간 보내면서 담배만 줄창 폈음
내가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길가에 앉아서 줄담 태우는 걸 보시더니 할머니 한 분이 이리 와 보라 하시더니 자동 펌프 있는데 빌려줄까? 하시는 거임 근데 지금 펌프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내가
‘제가 지금 튜브와 타이어 둘 다 펑크가 나서 자동 펌프로 바람을 넣어도 소용이 없고, 아예 타이어를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영업 중인 가장 가까운 자전거 수리점이 구마모토에나 있어서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긴 걸 설명드릴 정도로 일본어가 유창하지는 않은 데다가, 할머니는 사투리까지 쓰시니까 대화 진행을 못 하겠는거임
할머니도 답답하셨는지 동네 사람들 다 불러모으시더라고? 그 와중에 부른다고 진짜로 사람들 하나둘 모이는 거 보니까 시골 마을의 좁음은 어딜 가나 비슷하구나 싶었음
결국 모인 사람들 중에 젊은 유치원 선생님이 있어서 파파고를 통한 대화가 가능했다
유치원 선생님이 ‘그 긴 거’ 설명을 듣고는 근처 자전거 수리점에 다 전화를 돌려서는 사정 설명하고, 쉬시는데 죄송하지만 잠깐만 내려와서 수리해줄 수 있냐고 부탁하시더라
당연히 미캐닉 햄들도 신년인데 가족이랑 쉬어야지… 두 군데 거절당하고 세 번째 전화 건 곳에서 받아 주신다고 하셨음
받아 준다는 자전거 수리점은 여기서 10km 떨어진 곳, 바람 넣으면서 가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겠다 싶어서 선생님한테 감사 인사 드리고 출발하려던 차에…
그 자전거로 어딜 가냐고, 자전거는 우리 아버지 차에 싣고 넌 내가 수리점까지 태워 줄테니까 빨리 타라고 하셨음
뭐… 그래서 쿠마모토현은 뭐가 유명한지, 내일 신년인데 가볼만한 신사는 있는지, 이름은 뭐고 자전거로 여기서 무슨 호작질을 하고 있는 건지 등등 스몰토킹하면서 수리점까지 왔다
샵 도착
특수 타이어라 27.5인치 규격 맞는 타이어는 있어도 이거랑 완전 똑같은 타이어는 없는데, 그래도 갈겠느냐 뭐 이런 얘기 끝에 그냥 갈기로 함
내 타이어가 특수 타이어였나? 잘은 모르겠지만 MTB가 강세인 한국과 마마챠리가 대중화되어 있는 일본의 차이인 듯 싶기도 하고…
아무튼 타이어 갈고 서비스로 앞뒷바퀴 에어 충전, 체인에 구리스칠, 전조등 충전까지 받았다
진짜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막막했는데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진심) 하면서 120도 인사 세 번 박았음
사가현보다 구마모토현이 훨씬 볼 것도 많고 사람들도 친절하네요 펑크도 사가에서 났는데 구마모토에서는 수리까지 받고~ 하고 립서비스 하니까 그 자리 있던 사람들 그냥 자지러짐ㅋㅋ
슬슬 구마모토 시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잘 깔린 자전거 도로를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너무 졸리고 마음이 힘들어서 뭐 아무 것도 못 하고 잠듦
볼 거 보고 원없이 쉰다는 계획은 어긋났지만 그것보다 훨씬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올해(2024년)의 마지막 날이었어
이름도 뭣도 모르는 여행자를 위해 쉬고 있는 가게에 전화 돌려서 수리 예약해 주기, 가게에 차 태워서 데려다 주기, 쉬고 있다가 나와서 자전거 고쳐 주기가 쉽냐?
이 사람들은 그걸 해 준거고, 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정말 좋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음
애국이란 게 어렵고 먼 게 아니라 여행 온 외국인들한테 잘 해주기만 애국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번 편은 끝
내가 밤길을 달린다는 선택을 안 했더라면, 가방을 놓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친절한 분들을 만나지도 못 했을거임
밤길 달리고 가방 찾으러 갈 땐 좆같아서 시발시발 했었지만 결국 여행도 새옹지마인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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