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전) 후방병사가 싸울 의지가 없으면 벌어지는 일
각주: 이전에 시점만 안작군 중심으로 거의 똑같은 글을 옛날에 쓴 적 있어서 사실상 재업임. 원래 4월 25일 안작데이 쯤에 재업하려고 했지만 이전에 올린 글에서 내 말투나 글 쓰는게 좀 문제가 있다고 지적받아서 그것도 고칠 겸 기존 글의 문체를 바꿔서 써봤다. 최대한 이유없이 문단을 분리하지 않고 ‘~음’보다는 ‘~다’ 말투로 고칠려고 노력. (‘1차대전 안작군의 전설, 평온한 침투 전술’라는 글을 봤다면 거진 같은 내용이다)
1차세계대전이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독일 제국의 농업, 경제파탄으로 수많은 독일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순무과의 식물인 ‘루타바가’와 ‘톱밥 빵’으로 연명하다 영양실조, 면역력 약화등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루타바가를 그냥 순무로 퉁치기도 해서 이른바 ‘순무의 겨울’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 당시, 독일 제국 국민이 겪어야 했던 문제는 경제난 뿐만 아니라 내부적 모순과 정치적 혼란, 그로 인한 국가 전체의 사기저하도 있었다.
농촌에선 농사지을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도시의 공장에선 비료 대신 독가스를 생산하며 농촌이고 도시고 루타바가와 톱밥 빵을 먹는 그 와중에 왕족과 귀족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 계급갈등이 일어났고, 독일 내부에서 사회주의, 민주주의등 여러 사상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면서 가까이는 국민들의 분노, 멀리는 결국 킬 군항의 반란으로 독일 제정이 엎어지는 결말까지 초래한다.
그런데 이 당시 조직적인 심리전 개념은 없었으나, 이런 민간에서의 심리적 상황이 전장에서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있었다. 독일 민간의 극도의 혼란이 연합군 한 군집단의 독특한 전술과 만나 승화해, 그 독특한 전술이 엄청난 무용담을 남기며 만개하는 결과를 낳은 것인데 바로 영연방군 소속 호주-뉴질랜드군 즉 안작군의 평온한 침투(Peaceful penetration) 전술이 그 사례였다.
이 전술은 전장의 독일군 병사들 중 민간에서 온 비중이 높았던 후방 시설의 병력을 급습해, 그들의 낮은 사기와 전투 의지를 이용해 별다른 교전 없이 독일군의 전초기지나 관측기지 등을 장악하는 것이었는데, 갈리폴리 이후 안작군의 주 특기로도 여겨졌으며 호주와 뉴질랜드 전쟁영웅들의 많은 무용담을 낳았다.
국내에는 1차대전기 안작(ANZAC)군 하면 갈리폴리 전투에서 처칠의 병신짓으로 허무하게 쓸려나간 것, 그 정도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안작군은 갈리폴리에서 그렇게 갈려나간 후에 서부전선에서도 투입되었고, 그들은 서부전선에서 아무도 따라하지 못할 법한 엄폐 후 기습 그리고 후방 침투 및 파괴 전술을 발전시켜 ‘평온한 침투’라 불려지는 전술을 개발해 엄청난 찬사와 영웅담을 낳았다.
극소수의 병력으로 은신, 우회해 기습하는 모습이 흡사 현대의 특수전을 연상시키기도 해 일각에선 이 전술이 특수작전의 시조니, 현대 특수부대 전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느니 하는 설도 있지만, 일단 이 전술은 특수전 시조라기 보다는 1차세계대전 당시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나온 ‘환경에 의한 독특한 전술 양상’에 가까웠다.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렸다는게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전투 환경의 변화 ]
– 참호전이 고착화되고 서부전선 참호전 전술이 발전하면서, 참호전에 대한 연구가 가열차게 진행되었고 이전의 장총을 이용한 장거리 사격전 전술을 전면 부정하는 근거리 난투전-단축형 카빈, 경기관총, 권총을 이용한 침투, 돌격등의 전술이 국가불문 개발되었다. 서부전선의 참호전 자체가 지역에 비해 병력 밀도가 대단히 높았고, 그래서 더더욱 이러한 침투 돌격 전술이 유효해졌다.
– 이에 대응해 독일군은 아군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참호 방어전술과 적 참호에 반격하기 위한 후티어 전술등 공격전술이 동시에 개발되는데, 이런 전술들이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선 전장 곳곳에 독일군의 장기인 신속한 통신과 지휘체계의 발휘를 위해 전초기지, 전방관측소, 박격포 및 경보병포 포대, 통신기지, 장교가 배치된 지휘초소 등을 세워야 했다.
– 본래 이러한 전초기지와 여타 주요 거점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1917년까지 독일군의 전술은 ‘콘크리트 구조물과 기관총, 철조망으로 전장의 모든 곳을 도배하는’ 우주방어 전술이었기에 이러한 거점에 접근하려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정면돌파하는 수 밖에 없었다.
– 그런데 독일군의 마지막 발악인 춘계공세가 끝나고 1918년이 되며, 이런 상황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1) 독일군의 물자부족과 후방지원 부족으로 방어선 건설능력이 급속도로 퇴화되었고, 독일군 참호선은 이전과 같이 적의 침투를 완전히 차단할만한 고밀도의 방어선을 건설할 수 없었다. 또한 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전선이 본토로 밀리기 시작하고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지켜야 할 땅의 밀도가 낮아졌고 이에 이전처럼 개미새끼 한마리도 못지나가는 유사 휴전선을 만드는 것 보다는 공간적으로 넓어진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 잦아졌다.
2) 이전까지 1차대전의 전장은 지옥이라 해도 될 정도로 모든 수풀과 나무를 제거하고 거기에 참호를 도배한, 있더라도 소이탄과 함께 불타 없어지는, 매복할만한 수풀과 엄폐물이 없는 곳들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전선이 독일쪽으로 밀리면서 이전처럼 초토화된 땅이 아닌 어느정도 수풀과 엄폐물들이 있는 땅으로 그 전장이 바뀌었다.
[ 적군의 변화 ]
– 춘계공세는 독일군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인적손실, 특히 숙련 병력의 손실을 가져왔다. 이에 독일 제국은 징집 범위를 넓히고, 당장 전방 참호에서 싸우는 병력들을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젊고 건강한 병사들로 채우기 시작한다. 이는 즉 후방 참호의 전초기지나 관측초소에서 감시를 담당해야할 병력이 방금 모집된 10대 소년병이나 40~50대의 란트베어(후방군)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연합군이 기습적인 작전을 시행할 시 이에 대응하는 감시 수준과 대응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 문제는 병사들의 체력과 수준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었다. 최전방의 젊은 병력들은 보급이 우선시되어 민간과 비교할 때 비교적 나은 영양소를 보급받았고, 독일 제국의 각종 내부 문제와 갈등을 상대적으로 적게 보았으며, 당장 눈 앞의 적에 대한 살기로 인해 제국에 대한 불만은 심리적으로 미뤄둔 편이었다. 반면 징집 범위가 넓어지면서 민간에서 있다가 모집된 병력들은 독일의 내부모순을 더 직접적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대우도 전방 병력보다 낮았었기에, 전투 의지가 바닥을 기었으며 상관과 군 상부, 자신을 전쟁터에 투입한 독일 제국에 대한 불만이 적에 대한 살기보다 높기 쉬운 환경이었다.
– 이러한 결과로, 앞서 설명한 수많은 독일군 전초기지와 참호선 후방의 거점들은 비교적 후방침투를 통한 강행정찰에 취약해졌는데, 이에 영연방군에서는 그저 기존의 강행정찰에서 끝내지 말고 아예 정찰 병력으로 그 거점을 급습해서 빈약한 방어병력을 제압하고 거점을 점령하거나 박살내자란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 아군의 사정 ]
– 안작군은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미군에 비해 물자가 떨어졌고 보급에서도 영국군이 우선시되었기에 화력전을 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 그렇지만 이들은 갈리폴리때부터 숙련된 정찰병들임을 증명했고, 강행정찰과 매복에 있어서 당대 서부전선 최고의 프로페셔널들이었다.
사실 춘계공세 이전에도 ‘엄폐물을 이용한 강행정찰 후 급습’으로 적의 주요 거점을 제압하는 사례는 많지는 않아도 종종 있었다. 캐나다군은 1915년부터 17년까지 이른바 ‘탐험(prospecting)’이라는 은어로 불린 우회-매복-강행정찰-적 약점 파악후 급습 전술을 사용한 바 있었는데, 앞서 언급했듯 춘계공세 후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여타 영연방군 중에서도 특히 안작군이 이 전술을 평온한 침투라는 이름을 다시 붙이고 열정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1918년 봄이 지나면서 독일군의 춘계공세가 끝났고, 연합군은 정찰 실력이 뛰어났던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을 이른바 ‘무인지대’에 우선 투입했는데, 안작군은 무인지대에서의 강행 정찰을 통해 위에서 설명한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한다. 독일군의 방어 수준이 약해졌다는 것, 이전에 비해 독일군의 주요 소규모 거점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원래 ‘강행 정찰로 취약한 적 거점을 발견’하면 해야할 일은 전서구나 가까운 전신기지를 통해 포격지원을 부르는 거지만, 안작군이 보기에 이러한 소규모 거점을 지키는 후방병력은 전방에 비해 훨신 질적으로 떨어지는, 막 징집된 소년병이나 40대 이상의 노병들 혹은 이전까지는 복무 부적합으로 판정되다가 총력전으로 급하게 징병된 인원들이 많았고-앞서 말했듯 이들의 전쟁사기는 전방 참호의 최일선 병사들에 비해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이에 안작군은 ‘이거 그냥 우리끼리 찌르면 넘어오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18년 4월 5일, 호주군 5사단 15여단 소속의 제 58대대가 처음으로 독일군의 전초기지를 점거하며 이러한 전술이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했고, 이 전술의 효용성은 안작군 장교들 사이에서 부족한 물자를 극복할 수단으로 널리 퍼져 불과 몇 주만에 거의 모든 호주군과 뉴질랜드군 사단에서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첫 성공으로부터 3주 뒤인 4월 말 호주의 5개 사단 모두에서 ‘강행 정찰 후 직접 타격’에 대한 훈련을 실시했고, 41대대의 중대들은 누가 독일군을 더 많이 포로로 잡을까 경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 ‘평온한 침투’ 전술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1. 물자가 풍부해 화력전을 하는 영국군, 프랑스군, 미군이 기관총 포화로 적과 전면전을 벌이면, 그 사이 안작군 ‘정찰대’들은 8명 이하의 조를 짜서 수풀, 숲, 바위, 능선등의 엄폐물을 따라 독일군의 참호선의 후방으로 침투한다.
2. 후방에 널부러져 있는, 독일군의 주요 소규모 거점은 다음과 같았다.
– 독일군에서 고위 장교를 빠른 지휘를 위해 현장에 배치한 결과 만들어진 전방지휘소
– 전장을 파악하기 위한 고지대의 전방관측소
– 박격포호 등 중요성에 비해 자체 방어능력은 떨어지는 산병호
– 임시로 탄약과 물자를 쟁여둔 급조 보급지점
– 가장 중요한, 전보나 전서구등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통신기지
3. 이런 후방 시설을 지키는 병력을 예의주시하며 파악한 뒤, 전투력이 떨어지는 노병등이 아닌지부터 그들이 언제 방심하고 총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지 경계 수칙을 어기는지 같은 현장파악을 개시.
4. SMLE 단축형 소총, 웨블리 리볼버, 수류탄, 총검, 트렌치 클럽 등을 들고 돌격, 극소수의 병력으로 독일군 후방의 주요 기물에 접근하고 지키는 병력의 항복을 받아내거나 사살.
5. 아군의 상황에 따라 거점을 유지하여 활용할지, 파괴하고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지 결정.
이러한 일련의 작전들의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안작군 정찰조는 엄폐물의 크기에 따라 그 규모가 결정되었는데, 많은 정찰조가 4명이나 3명의 극단적인 소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앞서 말한 민간 출신 후방 병력들의 ‘심리적 문제’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 자명했다. 원래대로라면 징병대상도 아닌 사람이, 후방에서 독일 제국의 온갖 경제 파탄과 내부 모순을 보다가, 참호에 인력에 부족하다며 끌려온 이상-이들이 ‘삭신이 아파 쉬던 중 갑작스러운 총성과 함께 용맹하게 총검, 트렌치 클럽을 들고 돌진해 항복하라고 협박하는 용감한 적 병사들을 본다’면 상대 병사들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심리적으로 목숨을 걸고 이들과 맞서싸울 가능성은 희박했다.
(허버트 플러머 장군)
안작군이 개발한 ‘평온한 침투’는 독일군에겐 경악을, 아군에겐 환호를 받았다.
1918년 7월 13일 독일 2군 참모장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발표한다.
『지난 며칠동안 호주군은 여러 전초기지를 파괴하거나 포로로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심지어 낮에도, 아군 전방의 주요 시설들을 하나하나 차지해갔습니다….(중략)….우리를 전초기지와 전방구역에서 몰아내려는 시도에 대응하려면 우리도 (안작군에 맞먹을 수준의) 정찰 병력이 필요합니다.』
반면 영국군 소속 허버트 플러머 장군은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연합군 내에서, 특히 영국군에서, 호주 1사단보다 적의 사기를 꺾고 전투의지를 떨어트린 이들이 없다.』
평온한 침투의 여러 무용담중 잘 알려진 사례는 CR Morley 중위와 GE Gaskell 중위가 각자 네 명씩, 총 2개 정찰조 8명의 대원으로 독일군 두 개 기관총 산병호를 무혈 제압한 일이었다. GE Gaskell의 정찰조는 독일군 32명을 포로로 잡은 후 MG08 기관총 3정을 노획했고, CR Morley 중위의 정찰조는 4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36명에게 무혈항복을 받아내었다. 전투 이후 두 사람 모두 밀리터리 크로스 훈장을 수훈받았다.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안작군의 강행정찰, 후방침투 전술 즉 ‘평온한 침투’ 전술은 어디까지나 당시 전장, 전쟁양상, 적군 등 여러 상황이 맞물려 만들어진 특수한 산물에 가까웠으며 오늘날 특수전 전술의 기원이 되거나 한 것은 지나친 비약이지만, 그럼에도 이들 안작군의 용맹과 능력은 가히 칭송받아 마땅하다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이 ‘평온한 침투’ 작전의 성공사례는 직접적으로 심리전을 아군 쪽에서 행한 것은 아니지만 전장 내의 그리고 외에 있는 ‘사람’이란 각 개체의 ‘심리’라는 특성이 전쟁터에 얼마나 작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출처: 군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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