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핵개발 근접했다…박정희 ‘노란 봉투’ 빼간 범인 누구? (‘꼬꼬무’) [종합]
[TV리포트=한수지 기자]대한민국에서 핵개발이 무산된 진짜 이유가 공개됐다.
2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극비임무-대한민국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 편을 소개했다.
이날 방송에는 배우 한채아, 최다니엘, 모델 겸 방송인 정혁이 리스너로 출격했다. MC들은 “우리나라의 핵폭탄이야기”라며 “과거 이야기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더 민감하고 밀접한 이야기”라고 말해 궁금증을 높였다.
연세대학교 한영교 기념 도서관의 주인공인 연세대 초대 신학대학원장 한영교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됐다. 아들 한창석 역시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 출신으로 금수저를 물려받았고, 부유한 피아니스트 아내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한영교는 어느날 아들 한창석에게 “미국에 가서 나라에 도움이 될만한 공부를 하라”라며 핵물리학을 권유했다.
당시는 무려 6년간 지속되던 2차 세계대전이 일본에 떨어진 단 두방의 원자폭탄으로 끝이 난 상태였다. 세계는 미국 vs 소련의 구도가 됐다.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최소 20년이 걸릴거라고 예상했지만 소련은 불과 4년만에 미국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성공시켰다. 최다니엘은 “스파이가 있었냐”라고 물었고, 장현성은 “정확해”라고 말했다.
소련의 핵 실험에 성공한 다음해인 1950년대 한국에서는 6.25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핵 사용을 제안했다고.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 핵공격 디데이를 잡아놨고 대상지는 개성이 유력했다. 다행이도 디데이 10개월전 정전 협정이 체결되며 핵공격이 무산됐다.
이런 혼란한 시국에 한영교는 아들이 핵 공부를 하길 바랐던 것. 한창석은 아내와 100일된 아들을 두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핵물리학자로 일하던 한창석이 실종이됐다. 그의 아들은 ‘행복의 나라로’ 등의 노래를 발표한 가수 한대수였다.
가족들은 FBI로부터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인쇄소 사장으로 일하며 백인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창석은 한국 가족을 전혀 몰라보고, 한국어도 전혀 할줄 몰랐다고. 한대수는 미국에서 아버지가 핵기술을 빼가지 못하도록 세뇌를 당한 것 아닌지 의심했다.
한편, 1972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대한민국은 세계의 눈을 피해 핵개발 극비 작전을 펼쳤다. 북한이 핵개발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시 소총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하던 대한민국은 안보 위기를 맞았다.
이에 박정희는 “핵 개발을 검토하여 보고하라”라고 지시했다. 핵개발 극비 보고서는 작성 30년만인 2003년에 공개됐다. 보고서에는 핵폭탄 개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있었다.
이 비밀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는 박정희였고,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핵을 개발할 능력이 전무했다.
한국은 프랑스와 협력해 핵개발을 준비했고, 첩보전을 펼친 끝에 프랑스에서 재처리 기술을 가져오는 계약을 완료시켰다. 故 김철 박사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 시설의 제품을 쓰려고 했다면 그게 최소 핵무기 한두개는 만들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박정희 서거와 함께 전두환 정권으로 교체되던 시기, 핵무기 보안 문서인 ‘노란봉투’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오원철 수석은 박정희 서거 후 금고를 열었고, 핵무기 관련 문서인 노란 봉투를 차기 대통령인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노랑봉투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을 위해 전 세계에서 활약하던 250여 명의 과학자를 모두 한데 모아 연구를 마친 집대성 자료였다.
노란봉투가 사라진 후 오 수석은 미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당시 전두환은 미국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핵개발을 추진하지 않았고, 과학자들도 대거 해고했다.
미국무부 비밀문서에는 “현재 정보로 추정해볼 때 한국은 1980년경까지 핵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
장현승은 “우리나라는 어쩌면 핵무기 개발에 정말 근접해 있을 수 있었다”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한수지 기자 hsj@tvreport.co.kr / 사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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