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는 전쟁 중 중립이었을까? –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
당연히 아니다. 끗.
다만 ‘당연히 아니다’로 퉁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뒷사정이 있다.
1.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 영토에 있는데, 이집트의 국제적 지위가 정말 애매모호했다
2. 수에즈 운하에는 프랑스 지분도 굉장히 컸기에, 프랑스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다
3. ‘수로의 중립성’은 대체로 주변국들에 의해 개무시당하곤 하지만, 그래도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는 국제 여론이 존재한다
이집트는 명목상 오스만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역시 오스만의 입장을 배려해야 했다.
물론 꼬우면 오스만이랑 한 판 뜨고 이집트 독립을 강요하면 되는 일이겠지만,
오스만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동지중해에서의 활동이 존나게 귀찮아지기 때문에,
동지중해에서 가장 큰 지분을 발휘하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 다 이집트에 대한 ‘명목상 종주권’을 인정해주고 있었다.
오스만의 ‘명목상 종주권’ 그 자체가 수에즈 운하 통제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 더 큰 문제는, 이집트가 ‘오스만의 보호령’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최소한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베네치아가 ‘명목상 비잔티움 영토’로 남았기 때문에 신롬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명분을 얻은 것과 비슷한 일이다.
따라서, 영국은 수에즈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이집트 헤디브에게도 꼬박꼬박 협조를 구할 필요는 있었다.
물론 그 ‘협조’라는 것이 사실상 ‘사후통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프랑스의 영향력이었다.
수에즈 회사는 절반의 지분이 프랑스에게 있었는데, 영국이 이집트 정부의 소유 지분을 싹 다 매수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실질적인 운영은 프랑스가 하고 있었다.
1881년 이집트 장교 우라비가 민족주의 반란을 일으켰다가,
1882년 영국이 개입하여 (영국-이집트 전쟁) 이집트 전체의 통제권이 사실상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프랑스는 운하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개좆밥 이집트가 아니라 최강대국 영국을 상대해야 하게 된다는 현실에 긴장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는 영국과 1:1로 맞다이를 뜨면서 운하를 운영하느니,
아예 수에즈 운하 자체를 중립화 및 국제화시키는 게 프랑스 자신의 통제권을 유지하는 데에 더 낫겠다고 판단한다.
1856년 이래로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라는 국제법적 합의가 이미 점차 틀을 잡아가고 있던 바,
당연히 지중해나 인도양에 숟가락 얹어놓은 수많은 강대국들 역시, ‘수에즈 운하의 중립성’이 관철될 가능성에 상당한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오헝,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오스만까지, 유럽을 지배하는 총 9개의 열강이 모여,
1888년 콘스탄티노플 협약(Convention of Constantinople)을 체결한다.
이 협약문은 제1조에서부터
“수에즈 운하는 평시나 전시에 관계없이 모든 상업선이나 전쟁선에 대하여 국기의 구별 없이 항상 자유롭고 개방되어야 한다.”
수에즈 운하가 봉쇄당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시작되었다.
“헉, 그러면 수에즈 운하 구역은 완전한 국제적 중립 지역으로 규정된 것인가요?“
그럴 리 없다. 외교관이 얼마나 음험하고 교묘한 직업인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제4조
“본 조약 제1조의 규정에 따라 해상 운하가 전쟁 중에는 교전국의 군함까지도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어 있는 한,
조약 당사국은 운하와 항구에서 어떠한 전쟁권도, 적대 행위도, 운하의 자유로운 항해를 방해하는 행위도 하여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단, 오스만 제국이 교전국 중 하나인 경우에는 예외다.
교전국의 전쟁 선박은 엄격히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운하와 접근 항구에서 식량이나 물품을 수용할 수 없다.
상기 선박의 운하 통과는 시행 중인 규정에 따라 가능한 한 최소한의 지연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서비스의 필요성으로 인한 중단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의 ‘명목상 종주국’이므로, 수에즈 역시 이집트의 영토인 동시에 ‘오스만의 명목상 영토’이며,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전쟁 당사국이 되면 중립성은 깨져버린다.
또한, 전쟁 선박은 운하 및 주변 항구에서 보급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러일전쟁 당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던 러시아 군함들이, 일본의 동맹이었던 영국 당국의 집요한 방해와 검문검색을 받아
심각한 보급 부족 상태에 처하게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제10조
“술탄 폐하와 헤디브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허가받은 칙령의 범위 내에서
이집트를 방어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체 병력을 동원하여 취하는 조치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문제의 그 조항이다.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이집트 헤디브 아바스 2세는 수에즈 운하의 중립과 개방을 선언하였으나,
이에 풀발기한 영국군이 오스만을 지원하는 아바스 2세를 퇴위시켰고,
이집트의 주권을 ‘명목상 종주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국의 보호령 하에 완전히 이전시킴으로써 ‘이집트 술탄국’이 등장했다.
그 이후로, 1차대전기 중앙동맹국들의 선박이 봉쇄된 것, 2차대전기 추축국의 선박이 봉쇄된 것,
심지어 3차 중동전쟁기 이스라엘의 선박이 봉쇄된 것까지 전부 제10조를 걸고 넘어져 발생한 일들이다.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 영토가 되어, 8년 동안이나 좆되어버린 수에즈 운하의 모습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으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된 현재까지도,
이집트에게는 전시에 적국을 대상으로 ‘운하 잠가라’를 시전할 권리가 여전히 남아있다.
수에즈 운하는 이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운하가 하나 더 남아있다.
파나마 운하는 중립적일까?
1850년 영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클레이튼-불워 조약으로 인해,
‘중앙아메리카에서 건설되는 운하는 영미 양국 간에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파나마 운하 개통이 가시화된 1901년 헤이-폰스포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파나마 운하에도 ‘수에즈 운하 모델’이 적용되어 중립화가 선언되었다.
제3조 2항
“운하는 결코 봉쇄되어서는 안되며, 그 안에서 전쟁권을 행사하거나 적대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은 운하를 따라 군사경찰을 자유롭게 유지함으로써 불법과 무질서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수에즈 운하와 똑같다. 원칙적으로 봉쇄되어서는 안되지만,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헌병을 배치할 수 있으므로,
적절한 구실을 잡아서 특정 국가의 선박만 봉쇄시키면 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 1941년 7월, 즉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 5개월 전부터, 파나마 운하는 ‘운하 수리’를 명목으로 일본 선박의 통과를 금지시켰다.
파나마 운하는 1977년 체결된 토리호스-카터 조약으로 파나마 정부에게 이양되었으나,
토리호스-카터 조약은 ‘파나마 운하의 영구적 중립성과 운영에 관한 조약’과 ‘파나마 운하 조약’으로 나뉘는데,
‘중립 조약’에서는
제2조
“파나마 공화국은 파나마 운하의 중립을 선언한다.
평시와 전시에 모두 운하가 안전하고 모든 국가의 선박이 완전한 평등의 조건으로 평화적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하며,
통과 조건이나 요금 또는 기타 이유로 어떤 국가나 시민 또는 신민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하며,
운하와 파나마 지협이 세계의 다른 국가 간의 무력 충돌에서 보복의 표적이 되지 않아야 한다.”
라고 적어서, 마치 전쟁 시에도 모든 국가들에게 개방될 것처럼 써놨지만,
파나마 운하 조약
제4조 1항
“미합중국과 파나마 공화국은 파나마 운하를 보호하고 방어하기로 약속한다.
각 당사국은 파나마 운하 또는 이를 통과하는 선박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력 공격,
또는 기타 행위로 인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헌법 절차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운하와 선박에 가해지는 위험에 개입할 가능성 역시 열어놓고 있으므로,
미국은 언제든 지 꼴리면 파나마 운하로 향하는 특정 국가의 선박을 막아버릴 수 있다.
1962년 쿠바 봉쇄는 뭐 국제법에 맞아서 할 수 있었나? 1948년 베를린 봉쇄도, 스탈린이 국제법에 맞게 행동한 결과인가?
국제사회로부터 욕 오지게 쳐먹을 각오는 해야겠으나, 그래도 못 간다면 못 가는 거다.
출처: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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