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시진핑 일대기’
코로나 이후 더 돋보이는 국가의 지도자, 시진핑
14억 인구 지도자의 생애는 어떨까?
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공산당 8대 원로 중 하나인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급 동네에서 고급 유치원을 다니던 시진핑은 1962년 아버지인 시중쉰이 반당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시 16살이었던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시골로 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추방 당한 시골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리기도 했으며 공산당 입당 신청을 했으나,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데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나 시허핑은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이어 1975년 칭화대학의 화학공학과에 ‘공농병 추천 청강생’ 신분으로 무시험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 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 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시진핑은 1979년 ~ 1982년 국무원 판공청,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로 지냈는데 갓 화공학부를 졸업한 대학생이 한국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 비서진으로 3년간 활동한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후광을 많이 받았다.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주석 겸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하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된다
참고로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출처: 중국정치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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